vol.99-[유전자 에이전트 김용범의<방귀와 분뇨의 비밀 이야기⑧>] 방귀가 공정과 정직으로 이어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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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가족끼리 차를 타고 가다 방귀 냄새에 누가 뀌었느냐고 소리를 지른 적이 있다. 아주 구린 방귀였기 때문에 살짝 기분이 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뒤에 앉아있던 아이들이 서로 뀌지 않았다고만 한다. 통상 구린 방귀는 딸이 뀌는 경우가 많다. 여성의 장운동이 느려서다. 그러나 아무도 뀌었다고 하지 않았다.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으니 창문을 열고 냄새를 뺀 후 넘어갔다. 그리고 나중에 방귀 뀐 애가 자백했다.

설마 방귀를 뀌었다는 것을 숨길까? 싶겠지만 충분히 가능하다. 방귀는 역겨움과 혐오감을 줄 수 있다. 아마도 뀌었다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싫을 수 있다. 젊다면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겹쳐 더더욱 그런 것 같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거짓말은 줄고 경험적으로 좀 더 뻔뻔해진다. 행동이 달라지고 때론 주위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전철을 타고 가다 자리가 나면 비호같이 날아오는 분들을 보면 그렇게 생각된다.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대부분 나이가 든 사람들이다. 젊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나이가 들면 의외로 달라지는 것들이 많다. 주름만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사고방식을 포함해 많은 것이 바뀐다. 사람만이 아니다. 거미도 늙으면 거미줄을 대충 친다. 사람이 이렇게 바뀌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뇌 전두엽의 빠른 노화다. 노인은 전두엽 기능이 다른 뇌 부위보다 저하되어 본능 제어가 어렵다. 노인이 되면 애 같다는 말을 듣는 것도 이것 때문으로 생각된다. 참고로 아이는 상대적으로 전두엽이 덜 발달해서 본능적이다. 전두엽이 성숙하는 시기는 약 20대 중반이다.

나이에 따라 사람 행동이 달라진다면 방귀도 그럴까? 바뀌지 않을 것 같지만 확실히 바뀐다. 기본적으로 유전자 발현은 나이 영향을 받는다. 노화를 통해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방귀도 당연히 달라질 것이란 추정도 가능하다. 그러나 방귀는 유전자 영향만 받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뱃속에 사는 미생물 환경이 매우 중요하다. 나이를 먹으면 소장에 미생물이 과량 증식할 수 있다. 그리고 음식 습관 때문에 대장에 사는 미생물 군총이 달라질 수 있다. 또한, 근육의 퇴화해서 소화관 움직임이 느려져 음식물이나 변이 뱃속에 더 오래 머물게 된다. 이런 것들이 방귀 양이나 냄새에 영향을 미쳐 더 많이 뀌고 더 구린내를 풍기게 만든다.

할아버지 또는 할머니가 방귀를 뀌면? 더구나 지독히 구린 방귀를 뀌면 짜증이 확 날 수 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할까? 왜 할아버지 또는 할머니는 무례하게 아무 곳에서나 방귀를 뀌느냐고 핀잔을 줘야 할까? 그러면 달라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모른 척하는 것이 좋다. 자신도 늙으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들이 늙은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는 것이 더 좋은 해결책이다.

뉴스를 보거나 읽으면 때때로 ‘틀딱충’을 포함해 젊은 사람들이 노인을 비하하는 젊은 사람들의 말을 접한다. 노인의 행동이 젊은 사람들의 맘에 들지 않았으니 나오는 말일 것이다. 노인이 동작이나 말이 느리고, 고집도 세고, 고루한 지식으로 잔소리나 하며 때론 무례한 행동까지 서슴없이 한다. 젊은 사람들이 비하할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젊은 사람도 시간이 흐르면 그들처럼 된다. 노화는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은 그렇게 늙지 않을 것이라 다짐할지 모르겠지만, 생물학적 반응은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다. ‘틀딱충’이라 욕하는 사람도 그들과 비슷하게 된다. 오히려 더 그런 사람이 될지 모른다. 지금은 노인을 욕하겠지만 결국 자신도 다음 세대로부터 비슷한 대우를 받게 된다.

젊은 사람들이 늙어서 ‘틀딱충’이란 대우를 받지 않으려면? 아주 간단하다. 노인의 전두엽이 빨리 노화되어서 그런가 보다 하면 된다. 그리고 예의 바르게 옆 칸으로 피해도 좋고 잘 대우해줘도 된다. 전철 안에서나 어디서나 한 번 지나가다가 우연히 만난 낯 모르는 사람 아닌가? 자신도 그럴 수 있으며 인간 자체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젊은이가 늙어서 ‘틀딱충’ 대접을 받지 않는 방법이다.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하면 할까? 세상이 각박해지니 안 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제도를 바꾸면 젊은이의 행동이 달라질 수 있어서다.

제도가 행동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이제 설명할 것이다. 다시 방귀로 가보자. 성별을 막론하고 늙으면 방귀를 많이 뀐다. 방귀를 많이 뀌면 당연히 온실가스인 이산화탄소 배출이 많다. 방귀를 많이 뀌면 탄소세를 더 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 온실효과를 예방하기 위해서 제도를 바꾸어서 방귀세를 내야 한다고 했다고 하자. 적어도 외국에선 가축의 방귀세를 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니 사람에게 방귀세를 요구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나이든 노인이 많이 내야 할까? 아니면 젊은 사람과 똑같이 내야 할까? 모든 연령대에 똑같이 내라는 주장도 가능하고 나이에 따라 차등을 두어야 한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똑같이 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면 사람들은 한평생 사니 결국 똑같다고 말할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젊어서 일찍 사망할 수 있다. 일찍 사망한 사람이 늙어서 내야 할 것을 젊어서 내는 것이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 늙어서 내야 할 몫은 늙어서 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따라서 나이별 차등을 두는 것이 더 공정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정말 무엇이 공정할까? 근본부터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사람 방귀에 대한 세금 부과는 지금도 미래도 가능성이 없다. 현재 신경 쓸 사항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늘 접하는 수 있는 상황이 방귀세에 담겨있다. 사회에 더 많은 부담을 주지만 똑같은 비용을 내는 상황이다. 간단히 법을 잘 지키며 사는 정직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관계다. 누가 국가의 비용을 더 들게 할까?

집을 산 두 사람, A와 B가 있다고 하자. A는 10억짜리 집을 사서 10억에 매입했다고 신고했다. 그리고 취득세를 냈다. 원래는 4%지만 지금은 할인되어 1%다. 따라서 취득세는 1천만 원이다. B 같은 금액의 집을 매입해 8억이라고 신고를 했다. 그리고 그에 맞는 취득세 8백만 원을 냈다. 8억이 공시가격이라면 둘은 현행법상 어떤 처벌도 받지 않는다. 1가구 1주택에 양도세 부담이 없다. 당신이라면 어떤 사람의 행동을 택할까?

10억 원짜리 집을 살 돈이 없어서 남의 일이라고 할 것인가? 그럴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선택은 필요하다. A처럼 행동하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B처럼 하라고 해야 할까? 아마 A처럼 하라고 가르치지 않을까? 남들이 있을 때는 A처럼 행동하라고 하고 단둘이 있을 때는 오히려 B처럼 하라고 가르치나? 어쨌거나 A 같은 선택을 하며 살면 개인은 2백만 원만큼 더 세금을 낸다. 자기 주머니가 그만큼 물에 뜬다. A 같은 사람이 많으면 사람들은 A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B와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등장하면 바뀐다. 사람들은 차차 B의 행동을 따라간다. B의 행동이 개인에게 더 이익을 제공하고, 이익을 따라가려는 본능이 그렇게 행동하게 한다.

세금을 더 내면 그만큼 혜택이 온다는 주장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이 낸 세금의 혜택이 돌아온다는 것을 체감하기는 어렵다. 덜 낼 수 있다면 덜 내는 것이 당장 주머니가 덜 가벼워진다. 친구들과 술도 한잔할 수 있고 가족과 함께 멋진 저녁 식사를 즐길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보통 사람들은 세금 적게 낼 방법을 궁리한다. 때로는 적극적으로 부당한 행동을 해서라도 세금을 줄이기도 한다.

누군가 나라에 내야 할 세금을 착복을 반복해서 나름 돈을 벌었다고 하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어떻게 될까? 세금을 착복하다니 나쁜 놈이라고 할까? 이런 말을 하기는 하지만 정직하게 신고해 세금을 내던 사람들도 부정직한 그들을 따라 하게 된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며 해가 없으면 더욱 그렇다. 불법이 걸려 형벌을 받게 된다면 그것을 피할 다른 궁리를 해서라도 세금을 줄이려 한다. 생존에 유리한 방향을 따라가는 본능이 이렇게 무서울 정도로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

한편,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이 있고 좋은 사람이 있다면? 철학적으로 사람은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나쁜 사람을 목적으로 대할 수 있을까? 반대로 좋은 사람만 목적이어야 하는가? 그러면 나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다 없애버리나? 나쁜 행동을 한 사람을 다 없애버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나쁘다고 규정한 행동은 주변 여건에 따라 반복된다.

더구나 사회의 상태나 시대에 따라 나쁘다고 규정한 행동이 달라진다. 좋고 나쁨에 대한 기준이 불변도 아닌데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이 존재한다고 하면 사람이 목적이어야 한다는 원칙이 이상해진다. 나쁜 행동은 있어도 나쁜 사람은 없다고 할 때 사람이 목적이라는 명제가 더 다가오는 것 같다.

모든 사람이 목적이라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나쁜 행동을 한 사람도 있고 선한 행동을 한 사람도 있다. 또 어려서 생각이 짧은 사람도 있고 늙어서 방귀 많이 뀌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이런 행동을 한다고 무례하다고 무시해야 할까? 잘못한 사람은 무조건 나쁜 놈이라고 해야 할까? 요즘 유행하는 미투를 통해 과거의 나쁜 행적에 대해 지적을 받은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자. 우리는 그를 죽일 놈이라고 한다. 정말 그럴까?

성추행 한 번에 징역 20년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가혹한 형벌을 내리면 무서워 성추행을 안 할 것이란 이유다. 형벌을 강하게 주면 분명 일부 줄어들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본능 때문에 효과가 매우 클 가능성은 떨어진다. 시간이 지나면 형벌을 회피하는 자가 늘어나고 결과적으로 약자만 더 큰 고통을 받는다. 이런 것이 아니더라도 간단한 문제가 있다. 당신 아들이 성추행으로 징역 20년을 선고받으면 그것에 순순히 동의할 수 있을까?

어쨌거나 사람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생각해 보기 위해 태어날 확률을 계산해 보자. 엄마와 아빠가 만날 확률을 먼저 계산하고 거기에 정자와 난자가 만날 확률을 곱하면 된다. 간단히 엄마와 아빠가 만날 확률은 남자 2천5백만 중에서 한 명을 뽑을 확률과 여자 2천 5백만 중에서 한 명을 뽑을 확률의 곱이다. 어린이의 수는 제외해야 하지만 이것은 무시하자. 여기에 정자 난자 만날 확률을 곱하면 된다.

정자와 난자가 만날 확률은 정자수와 난자수에 의존한다. 정자는 한 번 사정에 3억 마리 정도다. 난자는 하나니 수정이 되려면 최소 3억분의 1의 확률이 필요하다. 여기에 정자 난자 모두 교차와 염색체 재배치로 인한 확률이 있다. 이 두 가지는 전문적인 것이어서 유전자가 섞일 확률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염색체 재배치 확률은 약 8백만분의 1이고 교차로 인하여 생기는 유전자는 조합은 너무나 다양해서 무한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엄마 아빠가 태어날 확률도 곱해야 한다. 게다가 양가 부모의 아버지 어머니인 할아버지 할머니가 만날 확률도 여전히 필요하다. 그 위에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고조할아버지 할머니 또 그 위에 조상들이 만날 확률을 곱해야 한다. 아버지에 아버지에 아버지에 아버지, 어머니에 어머니에 어머니에 어머니 이렇게 올라가는 것이 유성생식이 시작하던 때까지 가야 한다. 그리고 그 후에는 무성생식으로 바뀌어 유전자가 섞일 확률을 구해야 한다. 이렇게 끝까지 올라가면 기간이 약 38억 년이다. 지구상에 생명이 시작한 지가 38억 년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사람이 태어날 확률이 나온다. 얼마일까? 간단히 말하면 무한대 분의 1이다. 어떤 특정한 개인이 태어날 확률은 거의 0이란 의미다. 이렇게 극도로 낮은 확률이 가지는 함의는 무엇일까? 이 의미는 특정한 누군가가 태어나기 전에는 그 사람과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개체는 없었다는 뜻이다. 우주가 생긴 후 138억 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의미다.

동시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도 된다. 무한대 분의 1이란 확률이 0이라고 할 수 있어서 어느 시점에 이런 사건이 일어나면 그와 똑같은 사건은 다시 미래에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앞으로 우주가 얼마나 지속할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과 같은 유전자 조성을 가진 사람이 태어나지 않는다는 의미도 된다.

사람이 무능하든 유능하든, 모자라던 범죄를 저질렀던 그렇지 않고 능력이 뛰어나던 누구나 한 사람의 가치가 이런 정도이다. 희소성으로만 따져도 엄청나다. 이런 확률은 다른 생명체도 마찬가지다. 사자도 호랑이도 또 지나가는 개미나 은행나무, 개, 돼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여타의 다른 생명체와는 분명히 다르다.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어서다. 인간이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의 지배를 상당한 수준으로 받는 본능이 있다는 것은 비록 동물과 같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 수 있으며, 그들이 태어날 확률을 계산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인간은 유전자 관련 지식과 본능적 행동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능력이 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 덕택이다.

다른 그 어떤 생명체나 종도 이러한 것을 알고 또 그것을 이용하는 행동을 하지 못한다. 용맹한 호랑이나 사자, 용맹하고 머리가 똑똑한 침팬지에게 이런 것을 설명해줘도 그들은 절대 모른다. 더구나 그들은 이런 지식을 이용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게 되면 인간이 더더욱 다른 동물과 차별화된다. 따라서 인간은 다른 생물체에 비교하더라도 더욱 우월하다고 할 만하다. 인간이 진화의 존재로 동물이 되어도 여전히 그 뛰어남과 우월함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화는 다른 동물과 비교해 인간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것 같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완벽하게 제어할 능력은 없다. 방귀를 영원히 참을 수 없는 것처럼 사회가 하지 말라는 행동을 할 수도 있다. 인간의 이성은 본능의 하수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유전자에 담긴 수천수만 년 전 행동이나 부당한 이익 추구를 한다. 때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할 수도 있고 남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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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이택종 작가

이택종 작가는 강릉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꿈과 낭만 속에서 자랐다. 지난 25년간 만화가와 일러스트레이터로 살았다. 그 동안 여러 출판사에서 중·고등학교 교과서의 삽화 및 만화작업을 했다. 현재는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웹진 ‘e행복한 통일’에 월간 만화를 연재하고 있다.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선악이 생존보다 중요하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과학적으론 한 개인의 생존이 더 중요하다.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 악이 필요하다면 아마 사람은 그것을 택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악을 택하지는 않더라도 누군가는 택한다. 그리고 그런 선택이 다른 것보다 더 생존에 유리하다면 차차 이런 선택이 퍼져나간다. 그리고 그런 행동을 유발하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더 잘 살아남아 더 많은 자손을 남긴다. 나중에는 모든 또는 대부분 사람에게 악은 너무나 당연한 행동이 된다.

선한 행동이 언제나 옳고 좋은 것도 아니다. 과거 조선 시대에는 여성이 남편을 잃어도 재가하지 않는 것이 선이라 했다. 명심보감에 나오는 말로 ‘열녀 불경이부’라 했다. 열녀가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는 이 말은 본능의 관점에서 보면 자기 자식을 확인할 길이 없었던 시대에 남의 자식을 키우지 않으려는 남성들의 이기심이 만들어낸 말 같다.

어쨌거나 지금 누가 이렇게 생각하는가? 세상이 변했다. 세상이 권장했던 행동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생존 가능성은 생물에게 언제나 변함없이 38억 년을 이어온 중요한 가치다. 생존할 수 없으면 그 개체는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종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참과 거짓, 그리고 선악보다 살아남는 것이 생명체에겐 더 중요하다. 어떤 도덕적 기준도 생존을 위한 수단일 뿐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아무리 선해도 미래엔 오직 화석만으로 존재하게 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사람은 그가 태어날 확률을 계산해 보면 참 소중하다. 우주의 역사상 유일무이한 존재 아닌가? 그런 사람이 내 옆에서 내 눈을 보며 즐거운 또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소중하지 않은가? 비록 그런 사람이 지구상에 70억이나 되니 무시당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 사람이 가진 것이나 지위와 상관없이 소중한 존재임은 분명하다. 이렇게 소중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다치지 않게 해야 하지 않는가? 이것이 바로 그들을 도덕적으로 대해야 하는 이유라 생각한다.

사람이 잘못했을 때 벌을 주는 것이 소중한 사람을 도덕적으로 대하는 것일까? 몽둥이 찜질은 싫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근대에 들어서 태형은 없어졌다. 그러면 옥에 가두는 것은 사람을 도덕적으로 대하는 것일까? 나는 결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딸이나 아들이 소중하다고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런 자식을 대할 때 어떻게 대하는가? 잘못된 행동을 하고 위험에 빠진 후 뒤처리만 하는가? 이러는 부모는 없다. 오히려 자식이 다치지 않게 하고 넘어지지 않게 하며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한다. 잘못되거나 다치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주려고 한다.

이렇게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소중한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으로 사람을 도덕적으로 대하는 방식이라 판단된다. 인권 침해가 발생할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차단하기 때문이다. 내 자식이 이렇다면 남의 자식은 어떻게 대해야 할까? 당연히 확률로 보면 다른 사람의 자식도 내 자식 같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대해 줘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나는 사람을 조금이라도 다치지 않게 하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즉, 비난이나 형벌의 대안은 사람의 행동을 잘 살펴서 나쁜 행동을 하지 않게 주변 환경을 바꾸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선과 악 중 무엇인가를 선택하기 위해 고민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게 하는 것이며, 시험에 들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한 사람이라도 다치지 않는다. 살아가면서 언제나 도덕적 대우를 해 줄 수 있기도 하다.

요즘 대학가 불법 복제를 막기 위해서 감시를 강화한다고 하니 대학 교재를 예를 들어보자. 대학에서 수업을 듣는데 교재가 5만 원이고 복제 가격은 1만 원이라 하자. 당신이라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어떤 사람은 5만 원을 주고 교재를 사지만 누군가는 복제한다. 복제는 불법이니 나쁜 행동이지만 누군가는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아마도 유전자 때문일 것이다.

누구를 탓해야 하는가? 오랜 옛날부터 지금까지 누군가 이런 행동을 하면 그를 나쁜 사람이라고 하며 비난하고 형벌을 주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비난이나 형벌을 피하고 싶다면 나쁜 행동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그렇게 하면 타인이 행동을 바꿀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과학이 인간 본능을 들여다보니 이런 행동의 이유가 예상과 달랐다. 누군가에 대한 비난이나 형벌이 나쁜 행동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다. 그것을 주는 사람을 무시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능력이 있으니 자신 앞에서 까불지 말라는 의미였다. 즉, 비난하거나 형벌을 주는 주체가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존재임을 확인시켜서 피해를 받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타인의 행동을 바꾸는 것과는 사실상 무관한 방법으로 진화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형벌에 의해 사람의 행동이 좀 달라지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도로 나무아미타불이 되는 경우가 많았고, 사람이 바뀌면 같은 행동이 반복하기도 했던 것이었다. 한 마디로 어제도 하고 오늘도 하며 내일도 비슷한 나쁜 행동을 하고, 그 행동에 대해 비난도 형벌도 그렇게 똑같이 이어졌다. 이런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 형벌을 말하지만 달라지지 않았던 이유였다. 오히려 형벌을 피하려는 수단이 더 교묘해졌다.

이런 악순환을 없앨 방법은 기존 개념과는 정 반대다.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행동을 잘 살펴서 나쁜 행동을 할 기회를 줄이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우린 더 자세하고 정교한 교육과 변화된 환경 또는 제도가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교육은 과거처럼 사람의 행동을 선악으로 나누고, 나쁜 행동을 하지 말라는 방식의 교육이 아니다. 나쁜 행동을 할 기회를 줄이는 제도와 방법을 찾고 만들어내기 위한 교육이다. 이런 방식의 교육은 지금까지 없었다. 사회적으로 나쁘다고 생각되는 행동을 단지 하지 말라고 하고 형벌을 주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도 그 방향을 바꿀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이런 교육을 할 능력을 지닌 교육자를 양성하는 길일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인간을 둘러싼 환경과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 그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앞에서 언급했던 10억 원짜리 집에 대한 취득세를 다시 예로 돌아가 보자. 10억 원에 집을 집 가격에 대한 감정을 받은 후 매매하고 그 가격을 정직하게 신고할 경우 취득세를 1%로 할인해 주고 그렇지 않으면 원래대로 4%를 받는다고 하자. 그리고 정직한 신고라는 것을 증명할 체계가 있다고 하자. 매매하고자 하는 집의 가격을 공인된 기관이 감정하고 그 가격대로 거래를 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이미 미국에서 시행하는 제도와 비슷하지만, 거짓 신고일 경우 세금 할인이 되지 않는 점이 다르다. 이때 감정 등의 비용도 1천만 원이라고 하자. 주택의 공시가격이 8억 원이라 해도 무방하다.

이런 환경이 조성된 상태에서 어떤 사람이 10억짜리 집을 샀다. 그들이 8억 원에 집을 샀다고 신고할까? 사람들은 누구나 10억 원에 집을 샀다고 신고한다. 감정 가격 그대로 거래한 정직한 신고일 때 내는 세금과 비용은 2천만 원으로 가장 싸다. 그러나 거짓 가격으로 신고하면 내야 하는 세금이 4천만 원이다. 당신이라면 10억 원 상당의 집을 매입한 후 세금으로 2천만 원을 낼 것인가? 아니면 4천만 원을 낼 것인가? 쉽게 답을 구할 수 있다.

집 가격을 감정하는 감정사들을 항상 정직하게 행동하도록 관리할 방법, 그리고 더 비싸게 거래하고 감정 가격으로 거래했다고 할 가능성에 대한 보완은 필요하다. 이 방법은 개인적으로 거짓말 탐지기나 뇌 스캔 등의 방법 또는 기타 정직성을 평가하는 방법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양심의 자유 같은 기본권 침해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공익을 위해서 기본권 제한이 법적으로 가능해서 마음만 먹는다면 못할 것은 없는 것 같다.

이렇게 한다면 부동산 감정을 통한 거래 및 소득에 대한 세금 신고와 관련해 지금 보다 더 공정한 사회로 나갈 수 있다. 동시에 정직성을 평가할 새로운 일자리를 더 만들 수 있다. 사람을 정직하게 만들면 경찰, 검찰, 사법부 등에 필요한 국가 재원도 줄일 수 있다. 더구나 이런 비용 절감으로 남는 재원을 복지를 늘리는데 이용할 수도 있다.

본능을 이용해 정직한 사람들이 잘사는 환경을 제도적으로 만드는 일. 이러한 방식은 사람을 다치지 않도록 사람의 행동을 이끈다. 더불어 더 공정한 세상이 되는 길이기도 하다. 지금 세금 납세 방식과 달리 사람에 따라 악한 행동을 하려는 본능이 작동할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능을 알고 제도를 만들면 이런 환경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취득세 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에도 적용할 수 있다. 세무를 담당하는 사람과 세금 신고자가 정직성 평가를 받는다면 충분히 정직한 납세가 가능해질 것이다.

이런 사회가 만들어지면 부자가 불법으로 돈을 번 사람들이란 생각도 하지 않을 것 같다. 도촬 영상을 인터넷에 올려 수입을 늘리는 등 부당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사람은 당연히 줄어들 것이다. 나쁜 놈이라고 욕먹는 사람도 줄어들뿐더러 아마 부자에 대한 존경도 늘어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사람을 더욱 가치 있게 대우하게 되지 않을까? 정부의 세수는 더 늘어날 수 있고, 그것을 복지 재원으로 사용할 수 있다. 어쩌면 세금 비율을 낮추어야 할 가능성도 있다. 오히려 국민이 더 잘살게 되는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소중한 사람들이 잘못된 행동을 선택하지 않도록 하는 유혹이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것이 정말 사람을 소중하게 대하는 길이라 믿는다. 인간에 대한 본능을 알아내어 그 지식을 이용해 정직한 사람이 더 잘사는 세상. 이런 세상을 현실에서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우리다. 비록 인간이 진화된 존재고 동물의 유전자를 땜빵해서 사는 존재지만, 동물과는 차별화되고 본능을 뛰어넘는 세상을 만들 능력이 있는 존재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그 어떤 생명체보다 정말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이런 인간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함께 앞에서 설명한 세상을 만들어가기를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