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99-[엄민용 전문기자의 <우리말을 알아야 세상이 보인다⑮>] 집안 어른께는 ‘식사’를 대접하지 마라
우리나라뿐 아니라 인류가 하루 세 끼를 먹기 시작한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또 끼니나 때를 가리키는 ‘아침’과 ‘저녁’은 순우리말인데, 한자말 ‘점심(點心)’을 대신할 순우리말이 없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점심’은 우리 문화에서 비롯된 말도 아닙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끼니는 보통 아침과 저녁 두 끼를 의미했습니다. 다만 돈 있고 권력 있는 양반들은 아침과 저녁 사이사이 3차례 정도 간단한 음식을 먹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조 때의 학자 이덕무가 <앙엽기>에서 “조선 백성은 조석 2식으로 한 끼 5홉씩 하루 한 되를 먹는다”고 밝혔듯이 조·석 2식이 기준이었습니다.
이러한 식습관은 서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시대부터 중세시대까지 사람들은 한낮에 식사를 했고,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이 식사를 ‘디너(Dinner)’라고 불렀습니다. 지금은 ‘디너’가 “저녁 식사”를 뜻하는 말로 쓰이죠. 우리가 지금 점심의 의미로 쓰는 ‘런치(Lunch)’는 하루 중 아무 때나 먹는 “간식”을 뜻했다고 합니다.
즉 서양에서는 “하루 중에 먹는 가장 주된 식사”인 ‘디너’를 기본으로 하고, 수시로 간단히 요기를 하며 일상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19세기 산업화를 거치면서 노동의 효율을 위해 ‘에너지 공급’ 차원에서 하루 세 끼를 표준으로 삼게 됐습니다. 결국 삼시 세 끼는 현대 산업사회가 만들어 낸 새로운 습관이자 문화입니다.
‘점심’이란 한자말이 생겨난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중국 남송시대 때 한세충(韓世忠)이라는 장군과 관련된 것입니다.
당시 송나라는 금나라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전투를 앞두고 한 장군의 아내인 양홍옥(梁紅玉)이 직접 만두를 빚어 군사들에게 나눠 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군사의 수효가 많아서 넉넉히 나눠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군사들의 손을 쥐며 “만두의 양이 많지 않으니까 마음(心)에 점(點)이나 찍으세요”라는 말로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이에 사기충천한 송나라 군대는 8000명의 병력으로 금나라 10만 대군을 맞아 대승을 거뒀습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전쟁에서 병사들의 마음가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말이 ‘점심’인 셈입니다.
그건 그렇고요. 점심과 관련한 표현 중에 일상생활에서 “부장님, 점심 식사 하셨어요?” “언제 점심 식사라도 한번 하시죠” 등의 얘기를 흔히들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윗사람에게 ‘식사’라는 말을 쓰는 일은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식사(食事)’를 한자로만 풀이하면 “먹는 일”로, “식사하셨어요”라고 하면 “먹는 일 하셨어요”가 되기 때문입니다. “끼니로 음식을 먹음. 또는 그 음식”이라는 국어사전들의 뜻풀이를 보더라도 ‘식사’에는 높임의 뜻이 없습니다.
게다가 ‘식사’는 원래 우리 한자말이 아니라 일본식 한자말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食事’의 일본 발음은 [쇼쿠지]이지요. 특히 ‘식사’는 일본 군대에서 쓰던 말을 광복 후 일본군 출신들이 우리 사회에 퍼뜨린 것이라는 유래설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식사’라는 표현을 싫어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일본식 한자말이라고 해서 무조건 쓰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은 우리보다 몇 발짝 앞서 근대화 물결을 받아들였고, 새로운 물질문명의 언어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런 말을 죄다 쓰지 못하게 하고 순우리말로 쓰자고 하는 것은 언어의 사회성과 경제성에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또 일본식 한자말은 안 되고, 중국식 한자말은 된다는 사고도 옳지 않습니다. 여기에 더해 ‘식사’는 오래전부터 중국과 한국 등 한자권 나라에서 두루 쓰던 말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식사’는 웃어른께 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높임의 뜻을 전혀 담고 있지 않고, 말맛이 무척 사무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부터 어른들께는 ‘진지’를 써 왔습니다. “아버지, 진지 드세요”라거나 “아무리 급해도 진지는 잡숫고 가셔요”라고 했지요. 그 좋은 말 ‘진지’가 ‘식사’에게 밀려난 것이 지금의 형편입니다.
물론 ‘진지’가 좀 고리타분한 구석은 있습니다. 더욱이 사회에서 한두 살 많은 선배에게 쓰기는 정말 거북합니다. 그럴 때는 ‘아침’ ‘점심’ ‘저녁’을 쓰면 됩니다. “부장님 점심(저녁) 드셨어요?”라고 하는 거죠.
결론적으로 일상적인 말이나 글에서 ‘식사가 끝났다’거나 ‘저녁 식사로 떡볶이를 먹었다’ 따위로 ‘식사’를 쓰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나친 격식이 되레 불편을 불러오는 직장생활에서는 “부장님, 점심 식사 하셨어요”라고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 간이나 집안 어른들께 공손히 말씀드릴 때는 “식사하셨어요”보다 “진지 드셨어요”라거나 “점심 드셨어요”라고 하는 게 바른 언어생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