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86-[송상훈의 식물이야기] 그림 속의 꽃들1

프로필_송상훈

이번 회부터 3회에 걸쳐 명화 속 꽃들을 알아보도록 한다. 화가의 상상이 더해지는 그림에서 식물의 특정 부분이 강조 또는 생략되어 실체와 다른 모습으로 구현될 때 식물 명칭을 특정하기는 매우 곤란하다. 화가는 자신이 느끼는 사물의 실체를 특유의 발상과 감정으로 투시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럴 경우 필자는 그림의 식물을 추정하여 관련 있을 법한 식물들을 함께 소개할 것이지만 식물이 비교적 세밀하게 묘사된 경우엔 독자에게 생소한 식물들에 한하여 설명할 것이다.

# 모란은 부귀영화를, 연꽃은 청정과 극락 뜻해
보통 동양화에서는 식물의 형태가 대체로 분명한 편이다. 특히 꽃을 주제로 그린 ‘화훼화’나 꽃과 새를 주제로 그린 ‘화조도’, 꽃과 풀벌레를 주제로 한 ‘화충도’는 물론 4계절 군자의 성품과 처신을 의미하는 매난국죽(梅蘭菊竹) ‘4군자’가 그러하다.
동양화에서 꽃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데, 모란은 부귀영화를, 탁한 물에서 자라나 맑은 꽃을 피우는 연꽃은 청정과 극락을 뜻한다. 더불어 연꽃의 열매인 연과(蓮果)를 차음하여 연과(連果)의 의미로 과거시험 합격을 기원하는 등 소망을 내포한다. 이렇듯 등장하는 사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동양화에서 그림이란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讀畵)’ 것이기에 사물을 비교적 상세히 묘사한다.

잘 알려진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선덕여왕의 모란(목단)에 대한 이야기도 독화(讀畵)로 해석하면 숨은 의미가 드러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선덕여왕으로 즉위하기 이전의 덕만에게 아버지 진평왕은 당나라에서 보내온 모란 그림을 보여 주었다. 당시 모란은 한반도에 없던 식물이었다. 그림에 나비가 없음을 파악한 덕만은 꽃이 탐스럽기는 해도 향기가 덜할 것이라고 통찰했다는 것이다. 맞는 이야기일까?
전문가에 따르면, 나비 접(?)과 팔십 노인을 뜻하는 질(?)은 중국에서 같은 발음이기에 나비는 80을 뜻하며 모란은 부귀를 뜻하는데 나비는 80이란 한정된 세월을 담고 있으므로 그저 오래 부귀를 누리라는 의미에서 나비를 그리지 않은 것이라 설명한다. 같은 의견으로 한남대 조용진 교수는 모란은 부귀를 뜻하는 황제의 꽃이기에 벌?나비 등 잡스런 신분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의미에서 일부러 뺀 것이라 설명한다. 따라서 모란의 향기 여부를 떠나 나비는 그림에서 제외된 것이다.
그런데, 정말 모란은 향기가 없을까? 그렇지 않다. 강한 향을 갖고 있음이 보통이나 궁궐의 화려함을 더하려 꽃 크기에만 집중해 교배하면서 향기 없는 모란도 생긴 것이다. 당태종 그림의 모란이 향기 있는 꽃이었는지 향기 없는 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모란꽃은 매우 크고 탐스러워 보는 이를 즐겁게 한다. 공원이나 아파트단지, 대학 정원에서도 자주 접하는 식물이다. 그러나 가끔 작약을 모란으로 오기한 경우도 발견된다.
모란과 작약은 둘 다 미나리아재비과이며 꽃이 거의 같지만 차이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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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은 월동하며 자라는 목본이고 작약은 초본이다. 모란은 목본이므로 나무줄기가 겨울에도 남아 있고 작약은 봄에 뿌리에서 줄기가 나오는 풀이다.
모란은 잎의 광택이 덜하고 맨 앞 잎이 오리발처럼 어설프게 3갈래로 갈라진다. 작약은 잎의 광택이 분명하며 맨 앞 잎의 3갈래 갈라짐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당태종이 그린 모란은 정말 모란이었을까? 혹 작약 아니었을까 궁금하다.

# 4군자 못지않게 선비들이 좋아한 파초(芭蕉)
꽃그림은 조선시대에 많이 나타나는데, 조선 초기의 신사임당과 후기의 심사정, 김홍도, 장승업이 대표 작가이다. 특히 ‘초충도’로는 신사임당이 유명하며 많은 작품을 접할 수 있다. 여기서는 4군자 못지않게 선비들이 좋아한 파초(芭蕉)를 살펴보겠다.
4군자가 잘 알려져 있지만 여기에 연꽃, 소나무, 모란, 파초를 더하면 8군자라 한다. 정조대왕(正祖筆) 파초도와 심사정(1707~1769)의 파초도가 잘 알려져 있는데, 조선시대 가난한 사대부들은 월동하는 강인한 생명력, 즉 곤궁하지만 뜻을 잃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는 선비의 삶과 넓은 잎이 상징하는 부귀를 동시에 의미하는 파초를 귀히 여겨 비싼 값에 사들여 뜰에 심고 감상했다. 비라도 내리면 파초의 넓은 잎에 듣는 빗방울 소리에 취해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리고 술잔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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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정의 <파초괴석도>에는 파초와 잠자리, 괴석, 풀이 묘사되어 있다. 파초와 괴석은 선비의 기개와 굳건한 남성을 상징하고 잠자리는 청낭자(靑娘子)라 부르니 여성을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심사정의 또 다른 그림인 <파초도>는 거의 비슷하지만 잠자리 대신 난초와 국화가 묘사되어 있는데 파초와 괴석을 크게 그리고 난초와 국화를 작게 묘사하였다. 심사정은 자신의 잘못이 아닌 조부 심익창의 과거시험 부정으로 인해 출사길을 일찍이 포기하고 가난하게 살아왔다. 그럼에도 여느 사대부 못지않다는 자부심이 파초를 난초나 국화보다 더 크게 의미 부여한 게 아닐까 어설피 추측해 본다.

파초는 사대부뿐 아니라 사찰에서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불가에서 파초는 신의를 의미한다. 왈패로 떠돌던 단비구도라는 사나이가 달마대사의 제자가 되기를 간청했으나 거절 당하자 자신을 팔을 잘라 파초 잎에 싸서 바치며 믿음을 보였다 하여 유래되었다. 송광사에는 이를 묘사한 벽화도 있다.
파초를 처음 접하는 이들은 바나나인 줄 안다. 파초와 바나나는 둘 다 파초과로 생김새가 매우 흡사한 사촌임에도 분명한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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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꽃포가 바나나는 적자색이지만 파초는 녹색이다. 바나나 잎 뒤는 분백색이지만 파초는 앞 뒤 모두 녹색이다. 바나나는 열매가 커서 식용 가능하지만 파초는 매우 작고 떫다. 따라서 파초는 열매를 식용하기 보다 관상용으로 키우며 꽃바나나라고 부른다.

# 백합은 성모 마리아의 순결, 에덴동산을 의미
기독교와 관련한 서양화에서도 식물의 상징과 의미가 분명한데, 가령 백합은 성모 마리아의 순결 또는 에덴동산을 의미하고, 장미는 성모의 자비와 영광, 난초는 성모의 슬픔을, 딸기꽃은 낙원, 카네이션은 그리스도의 현신과 희생적 사랑을 상징한다.
바로크와 로코코시대를 거치면서 꽃은 지배력 있는 왕족과 귀족의 표상을 의미하면서 기독교적 의미는 서서히 퇴색 중이었다. 이 시절 꽃은 부와 풍요와 수집의 상징이었다.
튤립 버블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네덜란드는 국부가 상당해서 꽃을 수집하고 가꾸는 정원이 유행하였다. 더불어 식물과 관련된 정물화도 풍요로운 국민들의 수집목록에 포함되었기에 화가들은 보기 드문 꽃을 묘사하기 위해 계절을 기다리고 여행하는 수고를 감수하였다.
이 무렵의 대표적인 꽃 그림 화가로 프랑도르의 얀 브뤼헐(Jan Bruegel. 1568 ~ 1625)와 암브로시우스 보스카르트 1세(Ambrosius Bosschaert I. 1573 ~ 1621)를 들 수 있는데 역시 튤립이 자주 등장한다.
브뤼헐은 다양한 꽃으로 구성된 꽃다발 그림을 많이 그렸다. 희귀한 꽃을 찾아 꽃다발을 만들고 묘사하는 것은 그의 후원자에 대한 보상이었다. 비록 꽃의 기독교적 의미는 퇴색 중이었지만 귀족과 왕족의 육구를 만족시키는 역할은 커지고 있었다.
브뤼헐의 이 그림에서 큰 꽃은 좌로부터 백합(서양나리), 왕패모(프리틸라리아 임페리알리스 Fritillaria imperiali. 백합과), 모란이 보인다. 중간 크기로는 좌로부터 수국, 튤립, 붓꽃, 땅나리, 중앙에 많은 장미들이 있고, 작은 꽃으로 물망초, 수선화, 카네이션, 아프리칸 데이지, 수레국화 등 많은 꽃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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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헐은 과학적인 정밀도로 꽃을 렌더링하여 화병에 꽂는 위치에 변화를 주면서 비슷한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그는 각 꽃을 거의 중첩하지 않도록 배열하여 각자의 장점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했다. 이와 비슷한 형태의 그림들은 후대에도 영향을 미친 듯 하다.

여기서는 조금은 생소할 수 있는 패모(貝母)를 알아 보자. 한반도에는 조선패모와 중국패모가 자생한다. 조선패모는 꽃이 검어서 검패모 또는 검나리라 한다. 중국패모는 절패모라 하는데 녹색바탕에 연노랑꽃이 핀다. 여기 화가들의 그림에 나타난 패모는 왕패모라 하는 서양패모이다. 종모양의 꽃이 5월에 밑을 향해 피고 약용하는데 기침 해소에 좋고 혈압을 낮춰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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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즈 브뤼에르(?lise Bruy?re)의 그림에서도 다양한 꽃다발을 확인할 수 있는데 패모는 사람들에게 꽤나 인기 있는 식물이었던 모양이다. 화가들의 그림에 많이 등장하는데, 반 고흐(Van Gogh)의 그림에서도 볼 수 있다.

# 튤립은 명예와, 부와 영원 등 고귀한 가치들의 상징으로 여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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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브로시우스 보스카르트 1세의 <벽감 속의 꽃병>도 다양한 꽃들로 구성되었는데 붓꽃과 장미, 튤립이 주종을 이루고, 백일홍, 은방울꽃, 수선화와 바닥에 떨어진 카네이션이 보인다. 튤립은 꽃잎들이 위쪽으로 벌어져 왕관을 닮았다. 그래서인지 튤립은 명예와, 부와 영원 등 고귀한 가치들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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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에 아주 특별한 꽃이 보인다. 서울하우스 편집장 박은영의 평에 따르면 백합 대신 흰 바탕에 붉은 줄무늬 튤립 세 송이가 균형을 맞추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총독(Viceroy)’ 또는 ‘영원한 황제(Semper Augustus)’라고 불리던 ‘셈퍼 아우구스투스(Semper Augustus)’다. 이 튤립의 구근 가격은 집 한 채 값과 맞먹을 정도였다고 하니 작금의 비트코인보다 훨씬 버블이 심했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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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꽃은 부귀, 영화와 기독교적 상징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 이동의 변화를 암시하기도 하였다. 박은영에 따르면, 얀 다비즈존드 헤임(Jan Davidz de Heem)은 <유리 화병>에서 꽃을 전후상하로 조명하고 꽃의 상태를 묘사하면서 상징을 부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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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상부의 커다란 하얀 양귀비꽃(양귀비과)이 뒷면을 보여주는데 양귀비는 망각과 깊은 수렁을 상징하므로 화려했던 바로크, 로코코 영광이 저물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 설명하였다. 앞서 설명한 ‘셈퍼 아우구스투스(Semper Augustus)’ 튤립이 세 송이가 좌에서 우로 가면서 개화되는데 왕족과 귀족의 시대가 저물고 상업자본의 시대가 열림을 암시하는 듯하다.

양귀비는 동서양 모두 꽃그림의 주요 소재였다.

# 신사임당 그림에서 양귀비는 서양의 부정적 이미지가 아니라 다산을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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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을 실제와 가깝게 세밀히 그리는 조선 후기 화가로 신명연(申命衍)을 들 수 있는데 많은 꽃들 그의 손끝에서 세밀하게 묘사되었으며 <양귀비>도 그 중 하나이다. 신사임당의 초충도 8폭 병풍 중 7폭의 ‘양귀비와 도마뱀’ 또한 양귀비를 매우 세밀하게 묘사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신사임당의 그림에서 양귀비는 서양의 부정적 이미지가 아니라 다산을 의미한다.
작은 꽃은 패랭이다. 패랭이는 석죽(石竹)이라고도 부르는데 石은 오래 산다는 뜻이고 竹은 축(祝)과 비슷한 음으로 이해되어 석죽(石竹)은 ‘오래 장수함을 축하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조선시대 그림에서 패랭이가 유난히 많은 이유는 여기에 있다.
같은 그림의 장수하늘소도 장수의 의미이며 우측의 달개비꽃은 질긴 생명력을 의미한다. 중국에서는 도마뱀, 개구리, 지네, 전갈, 거미, 뱀을 부정한 뜻으로 사용하지만 한반도에서는 복을 부르는 상징으로 여긴다.

한편, 같은 양귀비라도 반 고흐의 양귀비는 다른 화가들의 양귀비와 다른데 개양귀비(화초양귀비. 꽃양귀비)이기 때문이다. 반 고흐 생존 당시 개양귀비가 많아던 모양이다. 비슷한 시기의 화가였던 끌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아르장퇴유 근처 양귀밭>이나 <자베르니의 양귀비밭> 등 6개의 양귀비 그림은 개양귀비를 소재로 삼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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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참에 양귀비와 개양귀비를 구별해 보자. 양귀비는 꽃도 크고 잎은 치커리 같은 느낌이 든다. 열매도 큼직하게 맺는데 흠을 내면 흰 유액이 나오면서 굳는데 이를 생아편이라 한다. 약이 귀하던 시절 집에 한두 그루 심어 배앓이 등에 사용했으나 지금은 전면 금지되었다.
한편 화초용 양귀비는 도심에서도 자주 눈에 띤다. 아네모네 비슷해 보이는 이 양귀비를 개양귀비 또는 꽃양귀비라 부르는데 양귀비의 아편 성분을 제거한 개량종이다. 위에서 서술했듯이 고흐 시절에도 개양귀비가 가득했으니 본종은 원래부터 있었을 것이고 이를 조금 개량한 것이라 할 것이다. 꽃은 앙증 맞고 잎도 가늘며 크기도 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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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와 개양귀비의 가장 큰 차이는 양귀비는 줄기에 털이 없고 개양귀비는 줄기에 털이 가득하다. 최근의 개양귀비는 아편 성분이 없기에 씨앗은 기름으로 내리고, 어린 잎과 줄기는 쌈으로, 셀러드로 식용할 수 있다. 최근 개양귀비에는 암세포 억제물질이 있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그림 속의 꽃들」은 다음 회에도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