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78-[송상훈의 식물이야기] 불 밝히는 식물1

# 식물기름으로 불을 밝힌 등잔불

세상이 밝아지고 있다. 질서 있는 조짐 끝에 여명의 기운이 번지고 있다. 촛불이 있었고 탄핵이 이어지고 조기대선이 펼쳐졌다. 지난 반세기 동안, 어떠한 지도자가 등장하건 그게 그거 아니냐는 정치 무관심이 서서히 개더니 이제 소통 가능한 지도자가 등장했다는 안도감으로 사람들의 얼굴도 밝아지고 있다. 당연한 권리에 대해 감사하는 아이러니가 우습지만, 그래도 참으로 다행스럽다.

19대 대통령과 정부가 부디 세상의 빛이 되기를 기대하며, 이번 회와 다음 회에서는 전기가 없던 시절… 그리 먼 옛날도 아닌 시절, 어두운 밤을 밝힌 등잔불의 기름을 제공한 식물들에 대해 알아 보겠다.

전구가 등장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모닥불과 화롯불로, 이후 등잔(램프)과 호롱불로 밤을 밝혔다. 등잔불은 삼국시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도자기나 토기로 만든 등잔에 삼이나 종이, 면실을 꼬아 만든 심지를 올리고 기름을 부으면 심지에 기름이 계속 스미고 불이 지속되었다.

전구의 등장이 매우 오래 된 듯하지만 불과 3~40년 전만 해도 전기 없는 시골이 많았다. 필자만 하더라도 초등학교 시절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친구집에서 등잔불을 마주하곤 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도 보통은 호롱불이나 양초를 쓰던 때였으니 아주 드문 경험이었다. 등잔을 매달은 천장에는 그을음이 베어 있었는데 천장에서 추상화처럼 너울대던 그을음과 불 그림자가 지금도 삼삼하다.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따르면 1880년 쯤 일본에서 석유가 도입 되었으니 필자가 본 등잔의 심지에는 아마도 석유가 스몄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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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상용화 이전에 쓰이던 등잔유에는 동물성과 식물성이 있다. 동물성으로는 고래기름, 상어기름, 정어리기름, 돼지기름, 소기름, 사슴기름 등이 쓰였으나 민가에서는 다양한 식물성 기름을 상용하였는데 동물성에 비해 그을음이 적었다.

대부분의 식물들은 종자와 잎, 줄기 등을 압착하면 소량의 기름을 얻을 수 있는데 식용유, 생활유, 등잔유, 윤활유 등 두루 쓰일 수 있을 만큼의 경제성과 유용성을 동시에 만족하기는 어려웠다.
칠흑 같은 밤이 길었던 그 시절, 등잔유를 만들 수 있는 나무가 마을의 공용재 역할을 하도록 마을 어귀에 심었다고 한다.

등잔유로 쓰인 기름은 머릿기름으로 공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서술할 식물들의 기름이 그러하다. 머리에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빈궁한 시절 머리를 헤집는 이와 서캐를 방지함이 주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주로 식용으로 쓰이면서 등잔유로도 쓰였던 참기름(호마유 胡麻油), 들기름, 콩기름과는 분명 다른 가치가 있다.

동백(山茶花. 차나무과) 기름은 앞서 얘기한 경제성과 유용성을 두루 만족시킨다. 큼직하고 탐스러운 씨앗의 70%가 지방인데 올레산이 풍부하고 산화가 적어 참기름, 들기름, 해바라기씨유, 포도씨유, 올리브유, 달맞이꽃종자유, 아마씨유처럼 식용유로도 훌륭하다.

치질과 상처, 기관지염, 심장질환에 좋고 면역기능을 향상시키며 피부노화를 방지해 주기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속적인 사랑을 받아왔다. 내구성과 내습성도 좋아서 종이에 바르기도 하는 등 생활유로서의 가치도 높다.

 

# 머릿기름으로 많이 쓰인 동백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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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여인들은 머리단장에 매우 공들인 듯하다. 그림으로 접하는 조선 후기 미인들 머리카락엔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있다. 옛 여인들은 창포로 머리를 감고 식물성 기름으로 마무리 단장했는데, 가장 대중적으로 이용된 것은 동백기름(애기동백인 산다화기름 포함)과 아주까리기름이다. 둘 다 냄새가 적으면서 윤기가 오래 지속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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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기름은 “상록수”로 유명한 심훈의 소설 “직녀성”에서 인순이가 머리에 바른 기름이며, 박경리 소설 “토지”에서 주인공 길상이 각시에게 주려고 구매하던 기름이고, 유성룡을 다룬 이수광 소설 “징비록”에서 향이가 바른 머릿기름이기도 하다.

남쪽에서 자라는 동백의 특성과 제조과정으로 인해 수량이 적고 비싼 편이었으나 선호도는 매우 높았다. 한류화장품 리더인 아모레퍼시픽은 창업자인 서성환 회장이 1930년대에 개성 남문 앞에서 동백기름을 상품화하여 판매하면서 시작되었다 하니 그 대중성을 짐작할 수 있다.

동백기름은 등잔유로도 손색이 없었다. 동백이 많은 을릉도는 70년대까지도 동백기름으로 불을 밝혔다. 을릉도에서는 동백기름을 바른 동백송편을 먹기도 한다.

 

# 평양기생이 바른다는 동백기름도 사실은 생강나무기름

생강나무(개동백. 산동백, 아주까리동백. 녹나무과) 씨앗에서 추출한 기름도 동백기름 대용으로 많이 쓰였다. 생강나무는 비목나무, 감태나무(백동백나무)와 같은 녹나무과 나무로 볕이 잘 들고 나무가 빽빽하지 않으며 배수 좋은 장소에서 자라는 암수딴그루 식물이다.

어린 가지와 새잎에서 생강냄새가 나므로 생강나무라 불리는데 이명에서도 보듯이 개동백, 산동백이란 이름을 갖고 있다.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에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내음새’는 생강나무를 말함이다.

생강나무는 산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대중적인 속성수인데 잎이 나기 전에 봄을 반기며 피는 황색꽃은 산수유의 엉성하고 거친 우산형태의 꽃과 달리 둥글고 치밀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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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동백, 산동백이란 이름을 가졌다고 해서 동백나무보다 하품일 것이라 오해하지 마시라. 향기가 더 고급스러워서 양반집에서도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평양기생이 바른다는 동백기름도 생강나무 기름이다. 흔히들 동백기름은 비싸서 서민들은 아주까리기름을 주로 이용했지만 향이 뛰어난 생강나무기름은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면서 사랑 받았다.

생강나무 어린잎은 나물로, 장아찌로 식용하거나 차로 우려 음용한다. 잎이 새 혓바닥만큼 자랐을 때 차로 만든 것을 작설차(雀舌茶)라고 하는데 녹차로 만든 작설차와 동명이품이다.

꽃은 다른 나물과 섞어서 식용해도 좋으며 특별한 색감을 느낄 수 있다. 어린 가지와 수피는 말려서 약재로 쓰는데 타박상과 통증치료에 좋으므로 산행 중 타박상을 입었다면 잎은 찧어서 환부에 붙여도 된다.

쪽동백나무(산아주까리나무. 넙죽이나무. 때죽나무과) 열매로도 기름을 내어 동백기름을 대신하였다. 이 나무 열매는 동백나무 열매보다 훨씬 작은데 동백처럼 기름을 낸다 하여 쪽동백이란 이름을 얻었다. 비슷한 이유로 산아주까리나무로도 불린다. 잎이 층층나무처럼 유난히 넓어서 넙죽이나무라고도 한다.

동백이 그렇고 생강나무가 그렇고 때죽나무가 그렇듯이 쪽동백나무도 수피가 미끈한데 모두 기름을 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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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죽나무과인 쪽동백나무는 그늘진 곳에 자생하며 때죽나무보다 키가 크고 잎도 넓으며 꽃도 더 향기롭다. 재질은 나이테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치밀하고 단단해서 목공예에 많이 쓰인다. 외국에서는 가로수로도 활용하고 있다.

가지를 따라 도열하듯 피는 꽃은 볕에 말려서 치통에 쓰거나 뼈를 붙이거나 단단히 하기 위해 접골목처럼 활용하였다. 또한 통증이나 종기를 없앨 때도 쓰였다.

은은한 향이 있는 기름은 동백처럼 등잔유로, 머릿기름과 비누 재료로, 양초 첨가제도 사용하였다.

쪽동백나무에 비해 잎의 크기 훨씬 작으며 꽃이 가지 따라 도열하지 않고 3~4개씩 무리지어 피는 때죽나무(때죽나무과) 열매도 머릿기름과 등잔유로 쓰였다. 빨래할 때 때가 잘 빠져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하고, 수피가 거무칙칙한 게 때를 밀은 듯 보여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하며, 열매 모양이 스님들이 여럿 모여 있는 모습이어서 떼중이라 한 것이 변한 이름이라고도 한다. 열매를 으깨서 물에 풀면 개여뀌가 그렇듯이 물고기가 마비되어 떼지어 떠오른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하는데 2012년에 전라남도해양수산과학원에서는 때죽나무 열매를 이용해 어류용 천연마취제를 개발하여 특허등록까지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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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실유(棉實油)도 등잔유와 머릿기름으로 사용

이 밖에도 때죽나무와 관련 일화는 많다. 동학혁명 때는 화약이 부족하여 열매를 화약에 섞어 사용했다고도 한다. 제주도에서는 빗물을 받을 때 때죽나무 재질의 통에 받는데 오래 두어도 물이 썩지 않고 맛도 좋았다 하는데 송악잎과 비슷한 효능이 있는 듯하다. 불을 피워도 연기가 나지 않는 나무라고도 한다. 이렇게 일화가 많다는 것은 어디에서나 잘 자라고 발견하기 쉬운 나무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면실유(棉實油)도 등잔유와 머릿기름으로 사용되었다. 목화다래라 부르는 목화(아욱과) 열매를 빻아서 짜낸 기름인데 야자유(팜유)처럼 깔끔한 풍미가 있어 부침과 무침 등에도 쓰였다.

과거에는 등잔유와 머릿기름, 비누재료로 사랑 받았다. 최근에도 화장품 재료로 유명세를 이어가는데 섬유질이 많아 주름진 피부 복원에 효과적이라 한다. 피부질환에도 효과 있어 직접 바르기도 하고 전립선암에도 효능 있다고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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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초, 북한에서는 생필품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목화와 아주까리 재배를 독려했다. ‘강성대국’ 실현을 위한 국민생활 향상의 최우선 과제로 경공업을 활성화하겠다는 것이다. 의류원료인 목화와 공업용 기름원료인 아주까리 생산은 나름 의미가 없진 않겠으나, 곧 바로 김정은이 등장하면서 사업이 지속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부디 북한에도 지도자다운 지도자가 등장해서 국가 전반을 아우르는 심도 깊은 정책이 구현되기를 바란다.

불 밝히는 식물은 다음 회에 계속된다.

송상훈 푸른아시아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