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67-[이천용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아름다운 숲 탐방기] 성곽을 둘러싼 느티나무 고목과 금강을 바라보는 공주 공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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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금서루가 보이는 공산성 전경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백제 역사 유적은 충남 공주시와 부여군, 전북 익산시에 분포한 8곳을 말하는데 그중 하나가 공주의 공산성이다. 공산성은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할 때 전열을 재정비하고 패색 짙은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운 역사성이 높은 성이다. 서기 475년 고구려의 대대적인 침략으로 도성인 한산성(漢山城)이 함락되면서 개로왕이 전사하였는데 22대 왕으로 즉위한 문주왕이 웅진(熊津:공주의 옛지명)으로 천도하였다. 성왕 16년 (538년) 부여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5대 64년간 공주는 백제의 수도였다. 공주시내 한복판 금강변에 고고하게 자리잡은 공산성은 흙과 돌로 함께 쌓은 산성으로 보전이 잘된 산성 중의 하나이다. 성은 동서 약 800m, 남북이 약 400m의 규모였으며 사방에 석루(石壘)가 남아 있는데, 대부분 조선 중기에 개수되었다. 봄에는 성 앞에 예쁜 꽃들이 화려하게 장식하고 성곽 주변에 선 소나무가 풍류를 더욱 느끼게 하므로 5월이 가장 보기 좋다는 공산성. 입구부터 갈지(之)자로 오르는 양옆에 소나무를 식재하여 흥을 돋운다. 조선시대 공주목사의 선정비가 모여 있는 비림을 지나면 구부러진 곳을 내려다 보는 느티나무 거목이 하늘에 떠 있다. 이름도 아름다운 금서루(錦西樓) 아래 입구에선 아낙들이 운동을 한답시고 벽에 등을 부딪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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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산성 아래 봄꽃이 만발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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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성을 내려다보는 느티나무 거목

 

문을 들어서자마자 세 갈래 길에서 먼저 오른쪽으로 간다. 인적도 드문데 숲이 주는 컴컴함, 그리고 간간히 서있는 거대한 느티나무로 인해 주눅이 들고 겁이 날 정도로 숲이 울창하다. 길은 보도블럭으로 포장되었으나 습해서인지 이미 숲의 색으로 변해버려 인공은 저 멀리 있다. 중간에 서 있는 낙엽송 직경이 40센티미터나 되지만 갈참나무와 같이 활력이 좋은 나무들과 경쟁하면서 빛을 잃는다. 급한 경사로 이룬 비탈면에도 상수리나무와 풀이 빽빽하지만 막상 역사적 유물이라고 지칭한 백제건물지에는 풀밖에 없어 세월의 무상함을 말한다. 초석없이 땅을 파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는 굴건식(堀建式) 건축이 475년 이전에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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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공산성내 숲이 우거진 산책로

 

쌍수정(雙樹亭)으로 가는 이정표를 따라가니 갑자기 훤해지면서 운동장보다 더 큰 평지가 나타난다. 쌍수정 앞에는 나무와 관련된 기념비가 있어 마음을 들뜨게 한다. 뒤의 커다란 느티나무를 거느리고 역사를 증명하는 쌍수정 사적비에는 인조가 이괄의 난(1624)을 피해 이곳에 머물렀던 10일간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영의정 신흠이, 글씨는 남구만이 썼다고 한다. 쌍수정은 1734년 이수함이 선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로서 두 그루 나무[雙樹] 밑에서 반란진압 소식을 기다린 왕은 난이 진압되자 자기를 위로해준 두 나무에게 정삼품 동훈대부를 내리고 성을 쌍수성이라 하였다. 나무가 죽어 없어지자 그곳에 쌍수정을 세웠는데 나무에게 벼슬을 내린 사실이 이곳에도 있었다는 것이 자못 흥미롭다. 그 당시 나무는 고사하였으나 그를 대신하여 백여년 된 느티나무가 아름다운 수형을 펼치며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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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 쌍수정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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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 쌍수정 주변 느티나무

 

안내판에는 조선 인조와 백성에 얽힌 얘기가 써 있는데 이괄의 난을 피해 온 왕에게 성안 마을사람 임씨가 떡을 해 바쳤는데, 그 맛이 하도 좋아 임금이 ‘임절미’로 불렀고 이것이 오늘날 인절미가 됐다고 한다. 아직도 문화재 발굴이 한창인 평지 끝에는 노쇠한 왕벚나무들이 나선형으로 몸통을 틀고 열지어 서 있다.

진남루로 간다. 원래 토성인 산성을 조선시대 석성으로 다시 쌓을 때 만든 남문이다. 성밖으로 나가기 전 직경이 1미터나 되는 거대한 느티나무 한그루 외롭게 성을 지킨다. 문을 나서면 숲 사이로 가파른 길에 계단을 만들었다. 성곽을 따라가지 않고 산책로를 따른다. 키가 20여미터 이상 되는 갈참나무를 주축으로 활엽수가 꽉 차있다. 급한 비탈에 선 나무들은 하늘로 올라가려는 직립성 때문에 비스듬한 모양을 보이지 않으려고 굳건하게 버틴다. 가끔 세월을 이기지 못한 나무들은 기울어져서 창피를 무릅쓰고 옆 나무에 의탁하고 있지만 세월을 어찌하랴? 난데없이 오동나무 거목도 숲의 일원이다. 종자가 가벼워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간신히 어린 싹을 올리는데 일단 줄기를 벋으면 훌쩍 커버리는 나무다. 다음 숲을 준비한다고 그늘에서 잘 사는 전나무를 심었는데 생장이 나쁘다. 올라가는 넓은 산책길은 성곽을 따라 내려오는 산책로와 교차하지만 그대로 오르면 임류각이 나오고 주변에는 키 30미터에 달하는 나무들이 산재한다. 옆의 사적비가 있고 그 앞에는 어김없이 느티나무가 오랜 세월을 벗한다. 백범 김구선생이 명명한 광복루(光復樓)로 가는 길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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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7. 성곽따라 난 숲속 산책길

 

성곽을 따라 새롭게 정비한 길로 가면 상수리나무 줄기가 Y자로 갈라지고 그곳에 사람이 넉넉히 앉을 만큼 넓은 공간이 있다. 성곽 저 아래 유유히 금강이 흐르고 왼쪽 숲은 평범하다. 성곽엔 나무계단과 돌을 박아 훼손을 최소화하였다. 가파른 성곽을 내려오니 갑자기 훤해지며 금강 건너편 공주 시내가 보인다. 비탈 저 아래서 생장한 나무가 성곽에서 보면 중간밖에 되지 않아 잎을 만지며 나무를 자세히 살필 수 있다. 길 끝을 마감하는 의미로 감나무 한그루 서 있고 성곽은 느티나무 거목에 감싸여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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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8. 성곽의 일부가 된 느티나무 고목

 

만하루 뒤편에는 9미터나 깊은 연못 연지(蓮池)가 마치 원형경기장 아래 운동장이 있는 것처럼 돌로 단을 쌓았고 저 아래 물이 있다. 넓은 공터에는 숲 가까이 영은사가 있으며 한그루 은행나무가 마음껏 공간을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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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9. 공북루와 연지

 

다시 성곽을 오르면 잠종보호 창고가 있고 그 아래 직경 2미터의 거대한 느티나무의 두 줄기가 붙은 채로 노출되어 있어 원래 한 나무가 두 나무로 된 것인지 두 나무가 자라다가 붙어버린 것인지 헷갈린다. 각 줄기의 직경은 80센티미터이니 밑둥은 얼마나 큰지 상상할 수 없다. 직경이 1.5미터나 되는 또 하나의 느티나무가 5미터 높이에서 두개로 갈라졌는데 줄기 부분은 혹을 이루고 둥글게 튀어나왔다. 어떤 곳은 새가 들어갈 만큼 작은 구멍을 만들어 새집이 되었다. 점점 쇠약해지니 후손을 많이 퍼뜨릴 욕심으로 엄청난 씨앗을 매달았다.

느티나무를 지나면 강이 시원하게 나타나고 공북루가 보인다. 여기서는 금강을 건너는 현대식 다리와 그 앞에는 물 밖으로 나무로 교각을 세운 형체만 남아있는 옛 다리가 보인다. 공주는 지정학적으로 내륙과 수로교통의 요충지였는데 특히 서울과 호남을 잇는 내륙교통의 비중이 커져 금강에 다리를 가설하였다. 1910년 자동차의 통행이 가능한 다리를 만들었고 1930년에는 강물이 줄고 늘음에 따라 같이 움직이는 배다리를 건설하였는데 이 나무교각은 1933년 금강철교가 생기기 전의 옛다리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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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0. 금강변쪽 성곽산책길

 

성곽 가까이에 거대한 느티나무가 5미터높이에서 줄기를 잃어버리고 수평으로 3미터 뻗은 줄기에서 다시 여러 개의 가지를 냈다. 땅위에 드러난 뿌리를 보면 직경이 2미터나 된다. 줄기의 꼭대기가 부러져서 키는 10미터에 불과하나 계속해서 자라 만든 멋진 수형은 큰 뿌리가 든든히 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성곽을 오르면 숲속에 꽤 큰 상수리나무들이 자라고 도시 소음이 자연을 깨운다. 가파른 길을 오르려니 점점 숨이 가쁘다. 약해지고 게으른 몸을 탓하면서 걸음을 재촉한다. 도시소음이 크게 들려옴은 출구가 가까워짐을 의미한다. 이윽고 출구가 보이는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멋지게 정비한 금강 둔치가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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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1. 공산성에서 본 금강과 공주시

 

정자에 잠시 앉아 쉬면서 공산성의 아름다움을 반추하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 속에 마음을 던진다. 망중한이다. 내려가는 길가의 소나무들은 활엽수의 위세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고 성 밖에서 본 느티나무만 독야청청하다. 직경이 1.5미터나 되는 느티나무가 위용을 가지고 산성을 지킨다. 그 아래 작은 공간에 소나무를 심어 숲을 유지하고 쉼터도 만들었다. 입구에 서서 뒤돌아보면 공북루로 직접 가는 평지가 있지만 얼마 전 유물발굴조사를 끝낸지라 아무 것도 없는 벌판이다. 백제의 옛 수도 웅진성. 곰나루라고도 불린 공산성은 도시 안에 잘 보전되고 복원한 역사유적지이며 숲의 보고이다. 특히 군데군데 서 있는 느티나무 거목은 성을 지키는데 손색이 없다. 영원토록 느티나무와 숲이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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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2. 금강에 발을 담근 나무들

 

사족으로 공산성의 발전을 위해 몇 가지를 제안한다. 낙엽송, 전나무는 공산성에 어울리지 않는 나무이다. 낙엽송은 베어내고 전나무 역시 큰 나무 아래서 가로수의 역할을 못하므로 없애는 것이 낫다. 새로 심은 소나무 집단과 기존 소나무의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다. 산성안의 차량 통행은 산성유적을 훼손할까 우려됨으로 해결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산성은 후손에게 물려주어야할 가장 큰 문화자산 중의 하나이다. 특히 살아있는 나무의 생장은 문화유산을 돋보이게 하는 요소임에 틀림없다. 관리자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왕이 좋아했던 나무, 공주에서 옛날부터 살았던 나무를 조사해서 산성전체의 식재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숲을 조성 관리해야 할 것이다. 산림 전문가의 조언을 경청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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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3. 활엽수 가운데 우뚝 솟은 소나무의 위용

 

 

글·사진 이천용 푸른아시아 기획이사·나무와숲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