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66-[송상훈의 식물이야기] 아까시나무와 천이(遷移)
‘동구 밖 과수원 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하얀꽃 잎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정겨운 동요 ‘과수원길’의 그 아카시아 본명은 아까시나무다.
아카시아와 아까시나무 모두 콩과 식물이어서 비슷해 보이지만 아카시아는 미모사아과 아카시아속에 속하는 상록수이다. 노란아카시아, 노랑미모사, 노란자귀로도 불리는데 꽃이 향수재료로 쓰이는 호주국화이다. 잎으로 보면 미모사나 자귀나무와 비슷하고 아까시나무처럼 가시도 있다. 열대에 주로 분포하므로 국내에서는 찾기 어렵지만 온실이나 식물원에서 만날 수 있다.
아까시나무는 북미가 원산지인 낙엽교목인데 학명이 Robinia pseudoacacia(로비니아 슈도아카시아)이며 그 뜻은 ‘가짜 아카시아’이다. 즉 이전부터 아카시아와 비슷해서 그리 불렸다. 국립국어연구원에서도 아까시나무를 아카시아로 부르고 있으니 둘을 헛갈려 해도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일본에는 메이지시대에 도입되었고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박정희 시대에 녹화사업으로 확대되었다. 가시가 있으며 꽃은 익히 보아온 대로 하얗고 탐스럽다.
우리가 잘 아는 아까시나무지만 자주 접하지 못하는 몇 종류가 있다. 분홍꽃을 피우는 분홍아까시나무, 가시가 없고 꽃도 피지 않는 민둥아까시나무, 붉은 꽃이 피면서 가지에 가시가 빽빽한 꽃아까시나무(Robinia hispida)가 그것이다.
황칠나무, 때죽나무와 함께 대표적인 밀원식물로서 곤충을 불러 주변 충매화의 번식을 돕고 숲 확장에 일조하면서 벌꿀도 선사하는 아까시나무는 엉뚱한 오해를 받기도 한다.
계명대 김종원 교수의 의견을 빌리면 아까시나무는 자리 비킴이라는 양보가 없는 못된 독재자(strong man)이다. 생명력이 대단해서 지상의 가지가 말라 비틀어져도 땅속뿌리만 있으면 4~50년이 지나도 다시 싹을 틔운다. 여기서 자리 비킴이란 천이(遷移)라고 하는데 아까시나무는 이러한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고집스런 식물이라는 것이다. 미래상상연구소 홍사종 대표의 의견도 다르지 않다. 양분 없는 황폐한 산림에 가시를 내밀며 숲의 권력을 거머쥐었던 아까시나무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출발부터 닮았으며 끈질긴 맹아력 또한 그의 통치행태와 닮았다고 한다. 물론 박정희 대통령을 평가함에 있어 경제적 성과와 정치적 오류라는 공과를 나누듯이 아까시나무의 공도 평가한다. 그에 따르면 아까시나무는 피폐한 산림의 복구를 위해 천근성(淺近性) 뿌리 끝부분에 있는 뿌리혹박테리아를 이용, 공기 중에서 양분(차관·借款)을 빌려 오는데, 이는 박대통령이 외국에서 차관을 도입해 산업화의 토대를 닦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평가다.
그 시대의 민둥벌거숭이 산의 사태를 막아주고 에너지빈곤을 덜어주는 땔감 역할도 했던 아까시나무는 석탄의 대중화로 더욱 번성했으나 지금은 우리나라 산림의 2%에도 채 미치지 못할 정도로 급히 쇠락하고 있다. 이러한 아까시나무는 정말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식물일까?
식물천이(遷移)를 좀더 설명하면, 처음에는 지의류가 자라고, 이후 초본류가 자란다. 초본류가 양분을 투여한 토양에 키 작은 관목이 자리 잡는다. 썩 비옥하지는 않고 메마르며 햇볕이 비치는 이 토양에 아까시나무, 소나무 같은 양지를 좋아하는 양수가 뿌리 내린다. 양수가 드리운 그늘에서 참나무나 단풍나무 같은 음수가 자라나 혼합림으로 발전하다가 음수가 양수보다 높이 자라면서 그늘을 드리워 양수는 고사하게 된다. 음수가 지배하게 되면서 소나무의 가벼운 송홧가루는 햇볕 잘 드는 고지대로 번져가고 상대적으로 무거운 씨앗을 가진 음수는 골짜기로 굴러 떨어져 무리를 짓게 된다. 음수라고 음지에서만 자라는 것은 아니다. 시작이 음지라는 의미고 이들 또한 햇볕을 좋아한다. 따라서 양수보다 더 높이 자라는 것이며 종국에는 고지대도 점령하게 된다. 이후 음수 중에서도 키가 더 높이 자라는 극음수인 서어나무, 까치박달나무, 후박나무 등이 지배하게 되는데 이를 극상림이라 한다.
이처럼 긴 시간을 두고 양수와 음수의 권력교체가 이루어지는데 대략 250년 정도 걸린다. 좀 더 들여다 보면 각 과정에서 모든 개체들은 영역 다툼으로 부산하다. 아까시나무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고 소나무, 단풍나무 등 모든 식물들이 그러하다. 거의 모든 수목은 낙엽을 떨궈 다른 식물의 씨앗이 발아하지 못하게 하는데 이를 타감(他感)작용이라 한다. 소나무가 독야청청하다는 의미는 홀로 우뚝하다 것이고 그만큼 타감이 강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소나무 원치 않는 곤충의 접근도 막는데 편백나무 숲하면 떠오르는 피톤치드는 침엽수의 독이며 특히 소나무에서 많이 나온다.
이렇듯 생존을 위한 분주함은 그저 자연의 섭리일 뿐이다. 혼자이지 않으면 무리 짓고, 무리 짓되 다른 종은 배척하려는 성질은 ‘스스로 그러한 것(自然)’이다. 20대 국회의 여소야대 현상을 자연의 천이로 흔히 비교 하는데, 사람간의 생활에 식물세계를 대입하는 것은 나름 설득력이 있지만 이로 인해 식물에 대한 오해를 빚지 않았으면 한다.
문득 어린시절 동무들과의 추억이 번져온다. 천이작용이 아닌 인간의 개발욕심 때문에 사라진 ‘아까시꽃 하얗게 핀 그 옛날의 과수원길’은 어디에서 다시 볼 수 있을까?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