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64-[이천용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아름다운 숲 탐방기]-경주 원성왕릉을 지키는 소나무숲

 

사진 1. 왕릉과 주변을 감싼 소나무숲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도시, 경주는 간직한 역사만큼 흥미롭고 그럴듯한 이야기가 많다. 예를 들면 신라시대에는 삼기(三奇), 팔괴(八怪), 삼보(三寶)가 있었다고 한다. 즉 세 가지 기이한 물건과 여덟 가지 괴이한 현상, 그리고 호국과 백성들의 정신통합을 상징하는 세 가지 보물을 말한다.

삼기는 금척(金尺)과 옥적(玉笛), 화주(火珠)이다. 금척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꿈에 신인(神人)으로부터 받았다는 금으로 만든 자(尺)다. 옥적은 옥으로 만든 피리인데, 죽어서 용이 된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의 혼령이 합해져 신문왕에게 내려 준 만파식적이라는 설도 있다. 화주는 선덕여왕이 지녔던 수정 돋보기다. 햇볕을 비추면 솜에 불이 붙어 화주라고 불렀다. 팔괴 중 하나는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 야산에 옛 신라시대부터 있었다는 금장대(金丈臺)다. 금장대 아래쪽은 경주의 젖줄인 형산강과 알천이 합류한다. 깎아지른 암벽 위에 세워진 금장대는 신라 제20대 자비왕(458~479) 때 을화(乙花)라는 기생이 왕과 연희를 즐기다 실수로 물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김동리의 단편소설 ‘무녀도’의 배경이기도 하다. 암벽에는 사람 발자국과 사냥 모습 등의 암각화도 있다.

‘압지부평(鴨池浮萍)’과 ‘백율송순(栢栗松筍)’도 팔괴에 포함된다. 압지부평은 임해전지(안압지)의 부평초가 땅에 뿌리가 닿지 않아 둥둥 떠다니는 모습을 일컫는다. 소나무에는 원래 순이 돋지 않는데 경주 백율사의 소나무는 가지를 치고 나면 다시 새순이 돋아나 이를 가리켜 백율송순이라고 부른다. 그 외에 남산부석(南山浮石:남산의 뜬 돌), 문천도사(蚊川倒沙:시냇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문천의 모래), 계림황엽(鷄林黃葉:움이 트면서 붉은색을 띄는 신비로운 계림의 나뭇잎), 불국영지(佛國影池:영지에 비친 불국사 전경), 나원백탑(羅原白塔:화강암의 흰 빛깔이 아름다운 나원리 석탑)도 팔괴에 든다. 삼보는 신라를 지킨 세 가지 보물인데, 황룡사 ‘장육존상’과 신라 진평왕 때 천사가 궁중에 내려와 왕에게 줬다는 ‘천사옥대’, 그리고 ‘황룡사 9층 목탑’을 말한다. <삼국유사>에는 ‘고려 왕이 신라를 치려고 하다가 말하기를 신라에는 세 가지 보배가 있으니 침범해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현존하는 문화재가 아니다. 몽골의 침략으로 불에 탄 장육존상은 현재 황룡사지에 석조대좌만 남아 있다. 

경주에서 울산 쪽으로 7번 국도를 타고가다 불국사 입구를 지나 1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신라 38대 원성왕릉 입구가 있다. 여기서 왕릉까지 500여 미터의 길은 모두 소나무숲으로 덮여있어 심상치 않은 숲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과연 왕릉주변에는 어떠한 숲이 있는지’ 기대감에 마음이 설렌다. 길 왼쪽 산속에는 구불거리는 소나무들이 빽빽하고 오른쪽은 가로수 사이로 확 트인 농경지이다. 차를 밖에 세우고 걸어 들어와도 그늘이 져서 시원하며 길옆의 독특한 형태의 여러 소나무를 자세히 볼 수 있다.

새로 단장한 주차장에서 산 쪽으로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소나무들이 지천이라 쉬기에 적합하고 숲속에서 배회할 수 있을 만큼 넓다. 다시 내려와 왕릉으로 가보면 능은 정면에 보이지 않고 외곽의 소나무가 먼저 보인다. 소나무들은 직경 20~70센티미터, 키 15미터 내외로 장대하지 않으나 한그루 한그루의 형상미가 뛰어나다. 곧게 뻗은 나무는 드물고 대부분 여러 줄기가 한 곳에서 나오고 대부분 몸을 비틀며 자란다. 소나무 껍질은 원래 붉은 색을 띄어야 마땅하나 해송같이 검은 색을 가진 것도 많다. 능 오른쪽 숲에는 어린 소나무들이 바닥에 뭉쳐 사는데 그 중에 건실한 것을 골라 후계목을 키워야 할 것이다. 지금처럼 콩나물 같이 있으면 모두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사진 2. 소나무숲에서 기다리는 차세대 나무들

숲바닥은 등나무가 완전히 덮어서 다른 풀들은 전혀 침입할 틈이 없었는데 얼마 전에 가보니 대부분 제거하였다. 등나무는 다른 나무를 감고 올라가는 성격이 있으므로 잘못 관리하면 소나무를 고사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사진 3. 숲바닥을 완전히 덮었던 등나무

등나무는 동래 범어사 입구의 등나무숲과 같이 야생 상태인 것도 있으나, 보통 관상식물로 심는다. 제지의 원료로 사용되고 줄의 대용으로도 유용하게 이용된다. 요즘은 줄기를 가지고 여러 가지 가구나 집안의 장식품을 만들어 시판하고 있다.

경주시 견곡면 오류리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89호 등나무는 꽃을 말려서 신혼 금침에 넣어주면 부부의 금실이 좋다고 하고, 부부사이가 벌어진 사람들이 등나무 잎을 삶아 먹으면 애정이 다시 좋아진다는 글이 회자되고 있는데 갈등의 원조인 등나무를 좋게 설명한 것이다.

왕릉의 전체 면적은 7.5헥타르로서 능 입구에는 돌사자 2쌍과 문무인석(文武人石)이 각각 1쌍씩 배치되고, 그 좌우에 석화표(石華表: 망주석 등 능앞에 세운 문)가 서 있고 석상의 모습이 아주 생생하다. 무상은 서역인의 특징이 잘 나타나 용맹함을 간직하고, 문상은 어질고 똑똑한 느낌을 준다. 2마리씩 나누어 마주보고 있는 돌사자는 동남쪽과 서북쪽의 것이 정면을 지키고, 서남쪽과 동북쪽의 것은 각각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려 남쪽과 북쪽을 지키게 한 기발한 배치형태를 보이며 특히 북쪽을 지키는 사자는 생동감이 넘친다. 석조물들은 왕릉주위의 12지 신상과 함께 8세기말 신라인의 독창적인 문화성과 예술성을 잘 나타내고 있어 보물 제14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진 4. 문인석

 

사진 4. 무인석

사진 5. 소나무 아래 쉬고 있는 돌사자
 

깊숙한 안쪽에 왕릉이 있는데 입구는 좁고 능은 넓은 호리병모양의 형태를 띠고 있다. 봉분이 하나뿐인 이 무덤은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본받았으나 둘레돌, 십이지신상, 난간, 석물 등 모든 면에서 신라능묘 중 가장 완벽한 형식을 갖추었으며 조각기법도 가장 우수하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신라 38대 원성왕릉이라고 부르기 전에는 괘릉이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능의 구덩이를 팔 때 물이 괴어 널[棺]을 걸어[掛] 묻었다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왕릉의 형태는 원형의 봉토분으로, 아랫부분에는 호석을 두르고 12지신상을 새겨 장식했다. 봉분의 지름은 약 23미터이며 높이는 약 6미터이다. 원성왕릉은 시내에서 동떨어져 있어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 한적하고 덩달아 문화유산해설사도 한가하다. <삼국유사>에는 원성왕릉이 토함산 동곡사에 있는데, 동곡사는 당시의 숭복사로 최치원이 비문을 쓴 비석이 있다”는 기록과 능 인근에 숭복사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원성왕릉으로 고쳐 불렀다.

원성왕의 본명은 김경신이며 왕비는 각간 김신술의 딸 연화부인이다. 780년(혜공왕 16) 이찬 때 상대등(上大等) 김양상(선덕왕)과 함께 김지정의 난을 평정한 후, 공로를 인정받아 선덕왕이 즉위하자 상대등이 되었다. 선덕왕이 죽자 김경신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선덕왕이 아들 없이 죽자, 대신들은 김경신보다 서열이 높은 김주원을 추대하였다. 그러나 김주원이 홍수로 인해 알천을 건너오지 못하자, 이를 하늘의 뜻으로 믿고 김경신을 왕으로 추대하였다고 한다. 유교정치를 지향한 원성왕은 788년 독서삼품과를 두어 인재를 등용하였다. 독서삼품과는 국학(國學)학생을 대상으로 치렀던 일종의 졸업시험으로 유교경전의 해석능력에 따라 학생의 등급을 나누었으며 이 성적은 곧 관리임용으로 연결되었다. 790년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인 김제 벽골제를 증축하고 농사를 장려하였다.

사진 6. 하나의 봉분으로 외로운 원성왕릉

사진 7. 봉분을 둘러싼 호석 중 12지신상의 하나

능 가까이에는 잔디가 깔려 있어 나무 그늘아래 휴식장소로 최적이다. 잔디밭에 누워 팔베개하고 하늘을 바라보면 시원한 바람과 함께 눈도 시원하여 머리가 맑아진다. 새들이 아름다운 노래소리를 들려주면 금상첨화이다. 능을 둘러싼 소나무숲은 특별히 거대하지는 않지만 아늑하고 아름다운 숲으로 성장할 것이다.

사진 8. 독특한 형상미를 보이는 왕릉주변 소나무줄기

왕릉을 지나 조금 더 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왼쪽은 유서깊은 충효마을과 마을입구에 100년 고택 수봉정이 있다. 1000년 역사의 원성왕릉과 신라의 절터 감산사지를 곁에 둔 덕분에, 마을의 역사가 1000년이 넘는다고 하며 6, 7대손들은 물론 14대 째 400년을 산 가문도 있다. 수봉정은 수봉 이규인이 1924년 빈민구제 및 교육사업과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처음에는 서당인 비해당(匪懈堂)과 약국인 보인재(輔仁齋)를 운영하도록 이층으로 지었다가 1953년에 일층으로 고쳤다. 정원의 일부를 개방하여 들어가 보았더니 고택만큼 오래된 향나무가 멋지게 자라고 있다. 갈림길의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감산사지 3층 석탑이 소소하게 서있다.

 

사진 9. 100년 고택 수봉정과 향나무

사진 10. 단아한 감산사지 3층석탑

이천용 푸른 아시아 기획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