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대지 – 만달고비 사업장 이동광 간사
이동광, 만달고비 조림사업장 파견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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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것은 즐겁다. 세상을 창조하는 자의 마음이다. 소설이라면 더욱 그렇다. 숨쉬지 않는 활자를 얼굴과 손의 감각을 지닌 따뜻한 한 인간으로 만든다. 그 주위라면 어떤가. 푸른 잎을 지닌 나무나 때론 황량한 사막의 한가운데에서 장미꽃과 대면하게 할 수도 있다. 저자가 비행기를 타고 어딘가에서 실종이 된다면 자신이 끝내 그 소설의 결말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를일이다. 그런 사람이 도통 있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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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와 편지를 막 쓰고 온 참이다. 그래서 오른손이 좀 쑤시다. 이 엽서는 한국에서 온 것이다. 물론, 약간은 몽골 우체국에서 사온 것들도 있다. 사진이나 그림이 한면에 가득한 이 한장의 종이를 사모으는게 나름의 취미다. 필연으로 사모으겠다고 한 것은 아니나, 그렇게 되었다. 흰면과 약간은 누런 나의 편지지는 뭔가 말을 하라고 하는데, 그에 응대하기가 힘들다. 말했다시피 손이 아프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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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는 조금은 나은편이다. 한참을 적으면 손가락이나 손목어딘가가 아프지만, 반대로 그렇게까지 쑤시면 그 내용이 나름 길어졌다는 증명이기 때문이다. 휴지통이나 가져다가 버릴 글이라도 우선 적어놓고 보면 속은 시원하다. 다 나에게서 나온 것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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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거치면, 외부의 어떠한 환경도 결국엔 나 자신의 것이 된다. 치기어린 고등학교때 나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 평등이라면 경험의 양과 질이 같다는 것이다. 소위 모범생이 성적이 좋고 담배도 피지 않고, 또 누군가를 때리거나 욕을 하지 않으면서 얻은 경험이나 불량학생이 담배와 술을 겸하고 여자를 만나고 다니고 욕을 하면서 겪은 경험의 질이 같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그 경험을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러한 시간들이 앞으로 삶에서 어떠한 영향을 줄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시간이 약간 지나고 나서 난 이 문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본적이 있는데, 칸트의 말마따나 질의 차이가 있다고 동의를 아주 ‘약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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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쨋든, 그런 것을 다 품은 사람은 경험을 소중하게 여겨야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결국엔 자신의 살이 되기 때문이다. 정체성이라고 하는 자신을 구성하는 그 경험은 기억의 형태를 가진다. 무언가를 기억하는 것만큼 그 경험을 값지게 만드는 것은 없다. 그래서 가장 슬픈것은 하루의 일상이 같다고 느껴서 부러 그런것들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나 오늘과 같은 내일이라는 이 진부한 표현은 그래서 세상 어떤 것보다 애처롭다. 기억이 없는 것. 그것은 결국 자신이 부재한 상황이다. 어디로 가는지, 무엇인지, 왜인지 등의 육하원칙은 실종된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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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 나무문을 열면 조림장이 보이는데, 가끔 노래를 틀어놓고 밖에 나가서 사방으로 눈을 돌린다. 그러면 문뜩 문뜩 내가 이 넓은 곳에서 혼자 서 있다는 것을 느낀다. 조용하고 넓은 이 땅에서 일자로 서서 하늘도 보고 나무도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저 멀리서 조용히 본다. 생각도 저절로 난다. 저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 맞다 저기는 안 가본 곳이네, 다음번에 한번 가볼까, 멀면 어쩌지. 저기에 가서 조용히 앉아 있어볼까. 도시에는 내가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겠지. 보고싶은 사람의 얼굴이나 기억들이 떠 오른다. 마음이 가만가만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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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모든 것을 기억할 것이다. 몽골에 처음 발을 디디면서 느꼈던 그 추움이나, 맡으면서 괴로워했던 그래서 한동안 저녁에 잠을 잘때도 신경이 쓰였던 그 매연이나 먼 7시간의 버스길이며, 나와 함께 일했던 우리 주민들의 웃음이나 손에 난 상처를 기억할 것이다. 시간은 모래시계처럼 나와 맞서서 끊임없이 닳게 할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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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살. 초등학교를 들어가기전에 내가 살던 곳은 광주였다. 그 옆집에 금은방을 하는 집의 아이 한명이 살았다. 나는 지금 그 한명의 아이를 ‘한명의 아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매일 같이 만나서 종이로 비행기를 만들며 놀고 달리고 또 레고를 했지만,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옷은 어땠는지 심지어 성격도 잘 모르겠다. 소설의 한 인물처럼 혹은 미술관에 있는 한 그림처럼 짧은 문장으로 남겨졌다. 그래서 나는 기억하려고 한다. 지금 나의 시간이 나중에 어떤 나라나 어떤 지역 혹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한다. 2012년에 나는 몽골 돈드고비 만달고비에서 박복수, 오기 그리고 우리 주민 23의 이름과 함께 지냈다고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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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건 습관때문이다. 이름이나 나이, 성별이나 학력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러 그런 것들을 잊었다. 나와 대화하는 사람만이 중요하다고 여기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그런것들을 지웠다. 그래서 이름이나 그런 것들을 아직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습관이란 어려운 관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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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중요하다는 마음위로 기억해야 할 것들이 있다는 생각이 몇년전부터 들기 시작했다. 빠져나가길을 한 가지 만들어 놓았으니 나름 안심이다.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나의 몸이 기억할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또 유일하게 본 만화책에 의하면 (이상하게 난 만화책은 도대체 볼 수가 없다) 정대만이 던지는 3점슛은 한두번 던지는 게 아니다. 수천번, 수만번, 수십만번을 던져본 슛이다. 몸이 기억하는 경험이란 그렇게 어디서든지 오롯이 자리를 잡고 나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