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양노르 방문기 – 강진아 ] 공포의 집들이
1108 공포의 집들이
여진 언니는 문을 열어주고는 은희 언니가 자는 중–우리의 영웅은 장렬히 전사했더랬지–이라며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그리고는 삼양라면을 두 개 끓였다. 영경이와 나는 바양노르의 인기스낵인 스모(сумо)과자, 우유빵, alpen gold 초콜릿, stimo 설탕쿠키를 아작 냈다. 물론 라면도 훌훌 들이마시다시피 했다. 다이어트를 선포하고 주전부리를 자제하려 노력하고 있던 우리가 이렇게 난폭하게 음식을 흡입한 이유는 오늘 대낮부터 저녁까지 주민들과 함께한 공포의 집들이에 있다.
바양노르 솜청에서 형편이 어려운 가정에 ‘게르’를 제공하였고, 대상자에 푸른아시아 바양노르 사업장의 주민들 중 세 가구가 포함되었다. 그 중 두 가구의 집들이에 참여해야 했다. 사실 한 곳에만 가는 줄 알고 나갔는데 낚였다.
약속 시간이 다가오면서 우리는 허르헉 파티(이틀 전에 있었던, 2010년 바양노르 작업 종료를 기념하고 고생한 주민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해 지은희, 서여진, 김영경 간사가 준비한 양고기 파티)의 참상을 재현하지 않으려 옷을 껴입고 제일 겉에는 지저분해지거나 냄새가 배어도 상관없는 작업복을 입었다. 그날 얻게 된 내 몸의 양 냄새는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으니까. 게다가 날이 추워져서 샤워와 빨래를 하기가 꽤나 힘들고 고된 작업이 되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양 냄새 흡수를 줄이기 위해 머리도 돌돌 동여맸다. 오랜만에 썬블록도 열심히 발랐다. 이렇게 무장을 하고 집을 나섰다. 아 참, 지은희 간사님이 축 쳐진 병사들에게 마지막으로 손에 쥐어준 것은 여행자 용 고추장. 미리 연락을 했던 사람들의 집을 돌면서 집들이에 갈 사람들이 모두 모였고 집들이하는 주인에게 줄 소정의 현금을 모아 흰 봉투에 담고서 다같이 ‘조카’ 경비원 아저씨의 게르로 향했다.
조카 아하(:오빠, 아저씨) 게르에는 대여섯의 사람들이 있었고 그 중 몇 분은 이미 거나하게 취해있었다. 그 분에게 감정 이입을 하면서 몰려드는 두려움, 집으로 돌아갈 때쯤 우리의 모습이 저럴까 하는 그런 따위의 상상과 한숨이 있었다. 하지만 몽골의 전통 잔칫상의 모습처럼 예쁘게 셋팅되어 있는 테이블 위에 더 예쁘게 서있는 여러 종류의 술들을 보고 마음을 단념시켰다. 몽골의 전통과자 혹은 빵을 예쁘게 둘러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아롤(동물의 젖을 발효시켜 만든 물렁하거나 딱딱한 흰색 발효식품)과 젤리 그리고 사탕들을 올리거나 껴 넣은 음식이 언제나 화려하다. 그 옆에는 뼈 채로 소고기가 올라가 있고 감자와 야채로 만든 샐러드도 담아져 있으며 예쁜 청색 무늬가 있는 자기그릇에 마유주도 그득히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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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수태차(우유차)를 그릇에 담아서 건네준 조카 아하의 첫째 둘째 딸들은 아주 분주했다. 솥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고기, 감자, 야채, 네모 납작한 면, 반시(만두)가 들어간 슐(:고깃국)도 신경 써가며 그릇이 비워질 때마다 설거지를 했고 손님이 들어오면 또다시 수태차를 대접했다. 예쁘게 화장을 했고 치파오 느낌의 화려하고 예쁜 델(몽골의 전통 의상)을 입고 있었다. 손님이 오는 중요한 행사에 주인이 예쁜 옷을 차려 입는 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물론 우리 넷을 제외한 대다수의 ‘손님’들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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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태차를 한 잔 들이키기도 전에 이곳 저곳으로 술이 따라졌다. 조카 아하가 찾아와 준 손님들에 대한 고마움을 얘기했고 일어선 모두가 건배를 했다. ‘툴러!(төлөө, 위하여)’
몽골 사람들은 술을 마시기 전에 네 번째 손가락에 술을 묻혀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튕기는 작은 의식을 하기도 한다. 그 행위를 하면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지은희 간사님이 그 팁을 써먹으려고 했었는데 주민들이 ‘넌 외국인이라 소용 없다’며 무시하고 술을 엄청 따라줬다는 얘기를 듣고는 우리 모두 포기하기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의식을 하고 나서 술을 마시는 몽골 사람들도 있긴 하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술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조카 아저씨는 연신 보드카를 따라 사람들에게 건네고 또 다른 누군가는 몽골 맥주를 따라 건넸다. 어느새 내 왼손에는 보드카가 오른손에는 맥주가 들려 있었다. 주민들과 함께 어울리는 즐거운 시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대낮부터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라는 생각에 속으로 많이 웃었던 날이었다. 숙취 있는 여자인 나로서는 난감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심지어’ 외국인이고 ‘심지어’ 조림장 매니저들인 우리에게 자비심은 있을 수 없나 보다. 안주를 열심히 흡입하며 술을 마시고 또 마셨다. 다 마신 줄 알았더니 테이블 뒤쪽 어딘가에서 쓱 하고 나오는 초록색 병. 몽골 소주였다. 잊고 있던 예쁜 자기그릇 안의 마유주(말젖을 가죽이나 통에 넣고 긴 시간 동안 저어서 만드는 몽골 전통 술로 가을에 제일 맛있다고 한다)는 엄청나게 큰 대접에 한 가득 따라져서 이쪽 저쪽으로 건네졌다(맛만 보고 상대방에게 술잔을 다시 돌려 주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렇게 했더랬지). 몽골 음식을 정말 못 먹는 서여진 간사님은 술도 맥주 한 잔밖에 못 먹는 여자다. 얼굴이 자줏빛으로 변해 펑! 터질 것 같이 되어버리는 최악의 병사다. 그래도 그녀 역시 몽골 생활 수개월 만에 주량이 엄청나게 늘었다. 그녀 몫의 음식은 우리의 그릇으로 조금씩 옮겨졌고 그녀의 술잔은 몰래 우리의 입으로 털어 넣어졌고 그녀에게 오는 또 다른 술잔을 막아내느라 우리는 바빴다. 하지만 아무리 얘기를 해도 계속 술을 권하는 주민들은,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흥에 겨워서 노래를 부르며 즐기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얘기했다. 내년 파견 간사들은 술을 잘 마시는 사람으로 뽑아야 한다고.
몽골에서는 상대방이 술을 권했을 때 많이 마시지 못해도 입을 대거나 조금이라도 마신 후 술잔을 돌려줘야 한다. 그리고 술잔에 술을 남긴 채 돌려줘야 한다. 한국 사람들을 오랫동안 보고 지내서 한국 술 문화에 익숙한 이곳 주민들의 ‘술잔을 다 비우고 거꾸로 털어보라는 식’의 제스처에 속아 이때까지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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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못해 우리의 히어로가 출동했다. 지은희 간사님은 자신이 집들이의 주인공인 마냥 조카 아하가 들고 있던 보드카 병을 가로채 사람들에게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이 집에 있는 보드카를 다 비워서 없애버리겠다는 굳은 의지가 그녀의 미소에서 무섭게 흘러나왔다. 우리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간사님을 사랑스럽게 쳐다봤다. 금새 보드카 한 병이 비워졌고 조카 아하는 연달아 석 잔을 마셨다.
그로부터도 한참 동안 집들이는 끝날 줄을 몰랐고 잉흐 벌드 아하의 2차 집들이 현장으로 연행되어 즐거운 축제에 또 참여하였다. 술을 따라주고 덕담을 해주고 노래를 부르고 음식을 나누었다. 한 사람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면 두 번째 소절부터는 모두가 함께 노래를 부른다. 웃으면서 눈을 맞추면서 멜로디와 흥겨움을 느끼면서 최선을 다해서 노래를 부른다. 가사는 모르지만 몽골 노래의 멜로디는 한국인에게 꽤나 익숙한 것이어서 나도 다른 간사들도 흥얼거리며 몸으로 박자를 맞추며 손뼉을 치며 그들과 함께 그 시간을 진하게 즐겼다.
집들이의 주인공인 잉흐 벌드 아하는 마치 바텐더처럼 음식과 술병들을 올려놓은 테이블 앞에 떡 하니 서서 술을 따라서 손님들에게 건네고 주스를 따라서 건네고 샐러드를 건네고 사탕과 젤리를 건넸다. 내가 술을 깨작깨작 마실라 치면 매의 눈으로 손님들을 쳐다보던 아하가 어서 마시라며 재촉을 한다. 심지어 엄청 서운한 표정으로 말이다. 이미 우리 간사들은 꽐라(맛이 간 상태를 가리키는 신생 단어인데 꽤나 그 의미를 잘 전달하는 것 같아서 사용했다)가 되어있는 상태. 전 날 잠을 잘 못 잔 지은희 간사님은 보드카를 엄청나게 받아 마시고 뱜바(또 다른 경비원) 아하 부부와 함께 집으로 갔고 서여진 간사님도 뒤이어 집으로 보냈다. 김영경 간사와 나는 서운해 하는 주민들 때문에 한참을 더 그들과 시간을 보냈다. 우리만 주민들에게 정이 든 것이 아니었다. 주민들도 간사들을 많이 애틋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다.
겨울이 다가오는 요즘, 해는 오후 6시가 되기도 전에 진다. 그래서 해가 지기 전에 인사를 하고 게르를 나섰다. 동갑내기 김영경 간사와 팔짱을 끼고 꽤나 신나 하며 빠르게 걸었다. 술을 많이 먹어서 탈이 나기도 하고 내 몸에서 김치냄새가 아닌 양 냄새가 날 때면(좋은 향기가 나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흠칫 놀라기도 하지만 몽골에 와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고 이렇게 소중한 관계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힘들어서 괴로워할 때도 많지만 분명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좀더 행복해지고 싶어서, 가슴 뛰는 일을 찾기 위해서 이 척박한 몽골 땅에 왔으니까.
공포의 집들이는 그렇게 끝이 났다. 앞으로도 그런 자리가 많이 있겠지만 몽골에 와서 ‘보드카 마시는 에르덴 뇨자(바양노르에는 출장으로 와서 한 달 반 동안 있었던 것이다)’가 되어버린 나는 몽골음식도 엄청나게 잘 먹기 때문에 딱히 걱정하진 않는다. 다만 엄청난 몽골의 매력에 빠져 허우적대는 대가로 위에 구멍이 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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