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경의 바양노르에서..] 자기만의 방 (A room of one’s own)

 

1014 자기만의 방 (A room of one’s own)

 

 

 

 

몽골에 온 지 얼마 안되었을 때 들었던 의문이 하나 있다. 처음 게르를 접하고 나의 잣대로는 놀랍기만 한 몽골 전통적인 그 개방성을 대면한 후, 이렇게 개인 공간이 부재한 나라에서 그 거대한 몽골 제국을 다스린 칭기스칸이라는 인물이 키워질 수 있었을까 하는, 조금쯤 순진한 질문 말이다. 흔히들 나만의 방이라는 말로 표상되는, 즉 침입 받고 싶지 않은 나만의 내밀한 이야기들을 열어볼 수 있고, 사회화되지 않은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생각들에 침잠할 수 있는 독립적인 공간이 부재한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곧 자의식이 자라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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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쯤 경이로웠던 몽골의 열린 공간 구조는 이제는 나에게도 현실이 되었다. 비록 게르는 아니지만, 꼭 그것처럼 분리되지 않은 몽골 여름 집의 열린 공간을 여러 동료들과 공유하는 이곳에서의 삶은 생활 그 자체부터가 한국의 그것과는 180도 다른 것이다. 1년간 일종의 가족처럼 각자의 역할을 분담하고 자리 잡은 이곳의 우리들은 업무 시간뿐 아니라 일상까지도 공유하고 있다. 우리 주민들은 (노크를 하는 등 외국인에 대한 예의를 갖추려 노력해주고는 있지만)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우리의 공간으로 불쑥불쑥 쳐들어오곤 한다. 단잠을 자는 휴일 오전, 소리가 나서 눈을 뜬 내 앞에 우리 주민들이 우뚝 서있던 그 광경에 흠칫 놀라던 그 순간들은 정말이지 쉬이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거기다 방문객들에게도 열린 이 공간에서는 종종 한번 얼굴도 보지 못했던 손님들과 한솥밥을 먹고 잠을 함께 자는 등 가족이 되야 하곤 했다.

 

가족들과 살 때라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가 있는 법이다. 혼자 기분이 나락으로 추락할 때, 조용히 마음을 추스르고플 때, 이곳에서 그러한 사치를 부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침대로 들어가 이어폰을 귀에 꽂는 정도. 거기다 아주 깡촌인 이 바양노르에서 조림장과 집 외에는 달리 갈 곳도 없다. 이곳의 우리 네 여자들이 무료해질 때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다섯 개 남짓 되는 조그만 가게들을 차례로 방문해 초콜릿이나 과자 같은 군것질거리를 쇼핑하는 일 정도이니까. 책을 본다거나 음악을 듣는다거나 일기를 쓰는 등 각자의 시간들을 보낼 수는 있지만, 그것은 충분히 독립적이거나 자유롭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공간에서이다. 복작복작 살아가는 이 일상에서 간혹 서로에게 서운한 감정들이 생겨 자잘한 감정의 부대낌이 있을 때, 그 때가 바로 몽골의 이 열린 공간이 가장 야속해지는 순간이다.

 

아직 이곳에서의 삶이 채 현실이 되지 않았던 처음에는 마치 캠프를 온 듯 신이 났었다. 박사님은 석탄으로 난로를 때우고, 지 간사님과 나는 밥을 하고, 아침이면 셋이서 낑낑대며 눈길에 수레를 끌고 물통 가득 물을 떠오고, 저녁 식사 시간이면 둘러 앉아 맥주 한 캔씩을 하는 조금 낯선 일상이 새로웠던 탓이리라. 이 모든 것들이 조금씩 현실이 되어가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나만의 공간이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던 내게 불 꺼진 성당이 그러했듯이, 펑펑 울고 싶은 날이나 조용히 생각 정리를 하고 싶은 내가 찾은 것은 그저 집 밖이었다. 한동안 집 앞을 지켰던 파란 트럭 뒤 켠, 2층에 난 소박한 발코니, 혹은 마당 뒤쪽에 흔적만 남은 마구간 울타리 위. 상쾌한 바깥 바람을 쐬면서 구경하는 일품 몽골 하늘과 너른 대지는 그때마다 든든한 나만의 공간이 되어 주었다. 파란 낮 하늘과 붉은 석양, 별빛이 가득한 밤 하늘은 가끔 이제껏 사람들이 내 주위로 쌓아 놓은 사회화라는 벽을 넘어서 생각할 수 있게 하기도 하고, 나라는 울타리를 넘어 타인의 입장과 감정을 상상해보게 하기도 했다. 목청껏 내지르는 소리가 미처 우리 집 안으로도 들어가지 않는 그 넓은 공간에서 나는 힘껏 노래를 따라 부르며 내 머릿속의 생각들을 지우고 몽골의 하늘과 땅에 녹아 들기도 했다. 어떤 까만 밤에는 쪼그리고 앉아 펑펑 울음을 터뜨리며 감정을 쏟아놓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이곳에서 복잡해지곤 하던 머리를 가슴을 정화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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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있고 싶을 때, 편치 않은 내 감정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 어디로 흘려 보내야 할 지를 고민하고 싶을 때 나는 종종 바깥으로 나갔다. 자취를 하던, 그래서 방 전체가 온전히 내 것임에도 나는 굳이 밖으로 나갔다. 집 앞 골목을 헤매거나 거리를 걷다 보면, 여태껏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떠올라 듬성듬성 비어 있는 생각 고리의 이음새들을 메워주곤 했다. 너무 내 중심적으로만 생각했구나,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겠구나, 또 한번 그렇게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하는. 그러고 보면 행인들이 배경으로 포함되던 그곳의 거리보다는 그 광활함으로 행인들조차 외부로 밀려나는 이곳의 들판은 자유로움과 탁 트인 시야가 확보되는 최상의 자기만의 방이다.

 

개인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분리된 닫힌 공간이 필요하다는 발상은 어쩌면 지극히 서양적이고 현대적인 것이다. 물론 내 마음을 머리를 어지럽히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벗어날 때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그리고 이외의 사생활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주거 공간을 분리하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목민들은 겨울의 혹독한 추위로 그러한 사치를 누리지 못했다. 영하 40도를 넘나드는 이곳의 겨울은 그들로 하여금 작고 열린 그래서 양똥과 염소똥을 태우는 난로가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주거 공간을 강요했다. 아니, 어쩌면 그들 스스로 그것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러한 열린 공간이 울프가 여성에 대해 우려했듯 자의식의 존재를 방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발달하는 인간의 자의식은 그러한 외부적 요소들로 인해 억제되기에는 일종의 본능일 테니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그것을 확보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보다 열린 틈에서도 독립적이고 개인적인 시간을 누릴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의 우리가 숨겨야 한다는 강박을 갖는 것들을 오히려 열어 보이는 자유로움을 얻었다. 지금 내가 수치스럽다고 생각하고 열어 보이기 꺼리는 것들 (예를 들면, 휴일 오전 잠이 덜 깬 모습 등)은 그들에게는 허물 될 일 없는 자연스런 것이다. 이들에게는 수유하는 장면이나 목욕하는 모습은 굳이 부끄러울 것 없는 일상적인 일이다. 어제 봤던 ()()’이란 영화에서처럼 필요에 따라서는 (주인공의 언니는 청각 장애인이었다) 열린 공간이 최상이 될 수도 있다.

 

버지니아 울프가 설파한 자기만의 방은 당시 영국의 여성 억압적인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개개의 여성들이 그것을 깰 수 있는, 변화를 불러낼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었다. 하지만 여성에 강요되던 획일적이고 일방적인 가치들은 좀 더 근본적으로는 사회적 관습적인 영향에 기인한 것이다. 여성들이 자기만의 방을 공간을 가지려는 시도는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변화시키기 위한 작은 한걸음일 수 있지만,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만 여성들이 정신적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식의 그 명제의 역이 항상 성립되지는 않는다. 나는 기존의 틀에서의 나만의 방이 없는 이곳에서 한국에서보다 더욱 넓고 황홀한 그것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한국의 나만의 방에서 얻을 수 있는 아늑함이 아쉬울 때가 있기는 하지만, 몽골의 광활함은 그것을 뛰어넘을지언정 부족하지는 않다. 광대한 토지를 가진 몽골은 굳이 작은 영역을 분리해 니 것 내 것을 나누지 않아도, 그 전체가 너의 것도 나의 것도 될 수 있는 열린 공간을 가진 나라인지도 모른다.

 

차창 밖으로 말을 타는 유목민을 볼 기회가 몇 번 있었다. 너른 초원 위에서 그들은 점처럼 조그맣고 자유롭다. 양과 염소들을 몰며 그들은 어떤 생각들을 어떤 감정들을 경험하는 걸까. 지난 휴가 때 말을 타고 테를지를 달리면서 나는 꽤 빠른 속력에 떨어지지 않으려 팔과 다리에 힘을 꽉 주느라, 그리고 흔들흔들 부대끼는 위장으로부터의 통증 같은 것들 때문에 그들만큼 온전히 자유롭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주위 경치의 운치나 피부를 스치는 바람 햇살 그런 것들을 감상하기에는 충분했다. 어떤 면에서는 온 땅 전체를 떠돌아 다녔던 몽골 유목민들에게는 그 온 땅이 전부 그들 자신만의 방이었던 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런 자유로운 기백과 영혼 그런 것들은 농경이 전통이었던 사람들에게 환상 같은 것들을 주곤 한다. ‘디지털 유목민이라는 말처럼 현대의 우리들은 그들의 자유로운 삶을 일면 동경하고 이상화하고 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들의 그러한 문화도 조금씩 변화를 맞고 있다. 우리는 나는 몽골에서 그러한 변화를 불러들이고 있는 입장일 터이다.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부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그 경계가 분명할 수야 없겠지만 나는 그것이 그들의 전통, 그 속에 녹아 있는 그 자유로움과 개방성 같은 것들을 잃지 않은 변용이었으면 한다. 나와 다른, 그래서 더 커 보이기도 하는 것들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이기보다 혹은 강자들에 의한 암묵적인 강요이기보다는 조금 더 과거에 연속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기를 그들 나름의 자의식을 잃지 않는 것이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누구보다 아름답고 광활한 그들만의 열린 방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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