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경의 바양노르에서..] 바다는 평화로울까
1009 바다는 평화로울까
작년 한 해의 화두가 소통 그리고 스스로의 한계를 대면하는 일이었다면, 올 해의 그것은 갈등, 충돌, 상처, 그리고 평화, 이런 말들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단어들은 타인과 나의 약점들을 대면하는 일, 그리고 그렇게 한계를 내재한 우리들이 서로 관계하고 그를 통해 무엇인가를 이루어가려는 마음들을 포함한다. 올 한 해의 나의 고민들은 이렇게 또다시 한 바퀴를 돌아 작년 내내 고민했던 소통이라는 화두로 환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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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로 떠나오기 전, 사전 교육 중 받았던 한 심리 검사 결과, 나는 평화주의자라는 항목에 배정되었다. 그리고 그 ‘평화주의자’라는 카테고리의 정의 속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갈등 회피라는 네 글자였다. 실제로 스물 다섯 해 남짓한 나의 시간들을 돌이켜보았을 때, 내가 행동하는 패턴 속에 갈등 회피는 꽤나 주요한 요소로 작용을 하고 있었고, 아마 그 때문에 나는 ‘뜨끔’ 도둑이 제 발 저리듯 그 단어에 주목했던 것이리라. 이곳에 온 이후, 반복적으로 겪게 되는 일련의 상황들 속에서 나를 고민의 수렁 속으로 빠뜨렸던 것도 다 그 단어였다.
이곳 현장은 푸른 아시아라는 이상을 향한 아주 작은 한 발자국의 걸음들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리고 이러한 아주 사소하고 미미한 ‘실천’들은 동시에 이곳의 주민들 그리고 동료들과의 끊임없는 갈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크고 작은 실랑이들의 연속. 하다못해 매일의 작업 일정을 논의하는 와중에도 작은 충돌들은 있게 마련이고, 특히 이러한 충돌이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지 않음으로 오해를 동반할 때면 종종 증폭되어 ‘쾅’ 굉음들을 내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유쾌한 일은 아닐 테지만, 일명 ‘갈등 회피형 평화주의자’인 내게 이러한 갈등들은 유독 내키지 않는 일이어서 작업 초기 이로 인한 신경성으로 장이 꼬이던 내게 지부장님이 해주셨던 ‘갈등 없는 평화가 존재하냐’는 물음에 나는 당돌하게도 ‘그렇다’고, 비록 ‘심심할지언정 갈등 없이도 평화는 가능하다’며 조금쯤 반감 섞인 답을 내어놓았더랬다.
문득 모든 역동이 정지한 그런 평화가 과연 살아있는 것일까 하는, 혹은 갈등 없는 평화는 그저 안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지독한 기침 감기로 현장을 떠나 UB를 찾았던 지난 주였다. (정말이지 가끔씩은 회피가 유익할 때가 있다) 이사를 하느라 온갖 물품들이 제자리를 잠시 떠난 사무실에서 문득 평화주의자 예수라는 책을 발견했다. 평화주의자라는 말이 시선을 끌었을까. 하룻밤 단숨에 그 책을 읽어버린 다음 날 아침 바양노르로 향하던 길 유독 파란 하늘만큼 내 기분도 파랗게 가벼웠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다시금 맞닥뜨려야 할 갈등들을 대면할 마음이 들었다. 물론, 이 희망적인 마음에 일주일도 되지 않아 다시 회의감과 불안감이라는 불순 분자가 섞여 들었지만 말이다.
책의 저자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는 평화를 향한 열망이 “고상한 추구” 속에서가 아니라 “보통 훨씬 단순한 것들, 즉 생활 속의 일상적인 스트레스와 피곤함, 그리고 … 우리가 미쳐가고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생겨난다”고 분석했다. 진정한 “평화는 갈등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직면하고 극복해서 나온 결과”이며, 소위 세상이 정의하는 안주하는 평화를 거부하고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자기 희생인 십자가 위의 죽음을 받아들”인 예수의 삶을 통해 재정의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우리 대다수는 “십자가 없는 부활을 선호한다”는 그의 통찰 역시 반박할 수 없이 사실일 테다. 굳이 종교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누구든지 ‘불편한 충돌’보다는 ‘편안한 안주’를 평화라 여기는 편이 훨씬 쉬운 법이다. 하지만 평화가 단순히 ‘편안한 상태’이기보다 흔히들 정의 혹은 사랑 등으로 표현되곤 하는 대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선물”이라는 저자의 논리는 아마도 옳은 것이다. 언젠가 윤 지부장님이 말씀해주셨듯, 평화나 갈등 그 자체보다도 이를 통해 무엇을 얻어낼 것인가 하는 물음이 선재해야 할 일이다.
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쉬운 평화를 꿈꾸어왔는지 모른다. 그리고 저자의 말처럼 비겁하게도 하지만 일면 당연하게도 나의 평화 선호 성향은 ‘평화’라는 허울 좋은 미명 아래 부인할 수 없이 스트레스나 고통을 회피하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불편한 갈등을 피하고픈 마음에 안주를 평화라 곡해하려 들었던 것이다. 물론 안주함이, 즉 잠잠히 덮고 넘어감이, 필요할 때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충돌이 필요할 때도 있다. 어떤 편이 지혜로운 지를 판별하기 위해서는 진부하지만 각자의 마음을 숙고할 일이다. 그리고 충돌 혹은 갈등을 대면함이 옳다 여겨질 때, 용감하게 그것을 대면해야 할 것이다.
의외로 역동적인 평화는 비록 완벽한 형태는 아닐지라도 우리의 삶 속에 이미 녹아있는 것이기도 하다. 주민들과 우리 간사들은 이러한 역동적인 평화를 이루어가고 있는 과정에 있다. 그리고 갈등을 회피하는 편인 나조차도 이곳에서 종종 충돌을 대면하곤 한다. 최근, 내가 우리 주민들 중 한 명과 큰 언쟁을 벌인 적이 있다. 작업 지시를 하던 중, 한 팀의 팀장인 다와수릉 아주머니가 이런 저런 불평을 해왔다. 울타리 치는 작업이나 퇴비 재료를 가지러 가는 작업에 비해 감자 캐는 작업이 어려운 데 자기네 팀만 계속 맡고 있다는 것이었다. 평소 지시한 작업에 타당한 이견이 있으면 주로 수용을 하던 나의 성향, 그리고 주민 중 나름의 영향력이 있는 그녀로서의 자존심 등이 배경이 되었을 터였다. 그 자리에서 다른 팀장들과 이런 저런 조율을 하려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고, 기존 방법대로 가는 것이 옳다는 판단이 든 나는 아주머니에게 오늘은 그대로 진행하자고 전했다. 그래도 마음이 차지 않았던 그에게 몇 차례의 설명을 더 했지만 그래도 완고하게 작업을 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반복적인 고집과 퉁명스런 표정에 순간 화가 난 나는 ‘쾅’ 큰 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러면 하지 말라고. 돌아가면서 작업을 진행하는 마당에 누가 더 힘들고 힘들지 않다는 말은 옳지 않다고, 함께 하는 일에 팀장이 그렇게 무책임한 말을 하려면 집으로 가라면서. 지시된 작업을 하기 싫은 사람들은 돌아가라고. 답지 않게 크게 울려 퍼지던 차가운 내 목소리, 하얗던 머리 속에 들었던 확신 한 조각은 이 언쟁의 필요성과 이러한 충돌에도 다와수릉 아주머니가 무책임한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날, 결국 다와수릉 아주머니의 팀은 감자 캐기 작업을 진행했고, 다음날 그녀의 팔짱을 끼면서 무엇이 불만이었던 것인지 다시금 묻던 내게 그녀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한 작업을 계속 하기보다는 여러 작업을 하는 편이 재미있다며 우물쭈물 변명했다.
충돌이 논리적이고 사실적인 부분에 국한되어 미묘한 감정의 영역으로의 침범이 비교적 적은 (즉, 상대방에게 이견이 수용되기 쉬운) 경우 이러한 충돌을 대면하기는 그래도 수월하다. 문제는 그 충돌이 감정적인 부분으로 큰 폭으로 전이될 수 있는 (즉 충돌이 전혀 생산적인 결론으로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이다. 충돌은 소통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생각의 충돌이 종종 언어적 폭력을 동반하고, 이로 인해 또한 심리적 상처와 고통이 수반된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소통에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대화’를 마주한 우리들이 종종 공격적으로 방어하거나 완고하게 마음의 벽을 쳐버리곤 하는 것은 모두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나는 주로 전자보다는 후자, 언어적 폭력을 행사하기보다는 차라리 덮고 가자는 안전주의, 일면 온화하지만 일면 비겁한 타입이다. 그래서일까. 소위 용감하지만 호전적인 사람들의 언어들은 종종 폭력적으로 내게 다가오곤 한다. 그렇게 얻은 상처들이 올해만도 몇 군데다. 물론 전자의 타입들이 상처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누군가의 말처럼 심리적인 상처는 외부보다는 내부에 요인이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의 형식부터가 호전적인 것에야 역시 외부에도 원인이 있다. 그리고 그 형식을 분리하여 소화시켜낸다 할 지라도 그 내용 자체가 상대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수준의 내 개인적 성향에 관한 것이어서야 일정부분 그 언어 자체에 폭력적인 요소가 없지 않다. 언어적 폭력 역시 물리적 폭력과 비견되는 범주의 폭력이라 규정한다면 말이다. 이렇듯 꽤나 커다란 스트레스가 수반됨에도 충돌이 필요한 경우, 충돌 이후 내가 얻는 심리적 고통에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책의 저자는 현대의 우리들은 고통을 다루는 법을 모른다면서, 고통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무엇인가를 얻어낼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말한다. 또한 신뢰하는 사람에게 털어놓고 공감 받음으로써, 그 고통을 흘려 보낼 수 있어야 한다고도 이야기했다. 일면 교과서스럽고 그래서 아마도 정답일 대답. 기독교적 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고통을 가한다면 기꺼이 그 고통을 받으라고 분명히 요구한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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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폭력의 고리를 끊고 평화를 도출하는 유일한 방법은 폭력을 끌어안는 일일 것이다. 과거의 (적색) 순교 그리고 현대의 백색순교라 지칭되는 그리스도교 순교의 의의는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러한 폭력의 수용은 묵인을 의미하는 것을 아님이 분명하다. 평화는 옳지 않은 것에 항거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사람이 지속적으로 소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자는 일컬었다. 그렇다면 나는 기본적으로 내게 폭력으로 다가오는 언어들의 부당성을 이야기하되, 그 방식은 상대방에게 비폭력적인 것을 지향할 수 있다. 그리고 나에게 고통으로 다가오는 심리적인 상처들을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갈등 상황 속에서도 평화를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바다처럼 말이다.
나는 바다를 참 좋아한다. 바다는 평화롭다. 하지만 동시에 수면위로 끊임없이 파도가 너울거리고, 해안가로는 밀물과 썰물이 반복된다. 바람은, 달은, 바다로 끊임없이 물결을, 그리고 밀물과 썰물을 불러온다. 갈등과 평화는 어쩌면 그 밀물과 썰물을 닮았다. 밀물 없는 썰물은 있을 수 없고, 썰물 없는 밀물 역시 있을 수 없으며, 그 쉼 없는 파도의 운동을 쪼개어 여기까지가 밀물, 여기까지가 썰물이라고 정의 내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밀물과 썰물, 그 끊임없는 역동 속에서 평화와 갈등이 반복적으로 도출되는 것이며, 따라서 조금 더 포괄적으로 보자면 그 움직임 자체가 갈등이기도 평화이기도 한 셈이다. 정의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명확화하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포괄적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바다는 그 자체로 평화인 셈이다. 한국에 돌아가면 나는 당장 바다를 보러 달려갈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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