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경의 바양노르에서..] 신뢰의 조건
0818 협력이 어려운 이유 V: 신뢰의 조건
몽골에 있는 동안 새롭게 깨닫고 발견한 것들은 놀랍게도 나에 관한 것들이다. 익숙한 한국이라는 틀을 벗어난 땅에서 나는 어쩌면 다시 한번 스스로를 정의해야 하는 과정에 있는지 모르겠다. 어떤 한 대상을 정의하는 것은 그 대상 내부적인 요인들보다는 외부적인 배경이라는 나의 가정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경험이랄까.
(과거 ego(자아)라는 말로 소설 속의 인물들을 분석하던 패러다임 이후, 영문학에서는 self(주체)라는 개념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김 교수님은 해설하셨었다. 한 인간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그 본연의 불변적인 특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자아라는 개념이라면 상황에 따라 변화가 가능한 것을 주체라 할 수 있다. 심리학적으로 보자면 꽤 고리타분한 선천 대 후천이라는 개념으로 전환될 수 있을까. 뭐 물론 아주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언젠가 개인적으로 조금쯤 비약적인 결론을 내렸듯 그 ‘선천’이라는 개념조차 모태 내에서의 환경적 영향을 고려하자면 ‘후천’일 수 있다 생각하는 나는 소위 선천론자이기보다는 후천론자이다. 나의 새로운 면모가 그 동안 간과되었던 기질이었다손 치더라도 그렇다면 인간은 무한한 기질들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되고 그 기질을 끌어내는 것은 역시 환경이라는 말이 되니 발달 심리학 수업에서 언급되었듯 유전과 환경은 결국 일정 부분 타협되어야 하는 성질의 개념이다. 어쨌거나 당시 나는 그것이 콩인지 팥인지를 결정하는 정도의 씨앗을 유전적 요인이라 본다면 이 식물이 얼만큼 자랄 것인지 얼만큼의 열매를 맺을 것인지는 환경이 결정할 것이라는 조 교수님의 의견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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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생긴, 기존의 나에 대해 의외적인 특성 하나는 내가 누군가를 신뢰하게 되는 패턴에 관한 것이다. 부모님에 따르면 유순한 기질 상, 혹은 자칭 갈등을 싫어하는 특성 상 거의 모든 사람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나는, 관계를 형성하고 정의하는 데 일면 우유부단한 편이었다. 조금쯤 이해할 수 없고 신뢰할 수 없어도 섣불리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않으려는 나의 경향은, 차이는 인정되어야 한다는 개인적인 생각의 실천이기도 했다. 하지만 24시간을 동료들과 공동 생활을 해야 하고, 이 관계에서의 협력이 생활적인 면이건 일 적인 면이건 모든 면에서 필수불가결한 이곳이라는 배경은 (나는 종종 이곳에서 결혼한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여러 사람들과 공유해야 한다 표현하곤 한다) 나로 하여금 관계 맺음에 있어 보다 빠르고 단순한 판단을, 표현을 하게끔 했던 모양이다. 이곳의 나는 관계에 있어 비겁한 사람에게 냉정해진 반면, 문제 해결을 위해 사회적인 리스크를 감수하고 자신을 열어 보이는 용감한 사람에게는 우호적인 사람이 되었다. 내게 있어 협력이 가능한 전제인 신뢰 형성의 조건은 진솔한 소통의 가능성, 그리고 그로 인한 변화의 여지라는 문장으로 명료화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패턴 역시 과거의 나에 미루어 꽤나 극적으로 변화하여 솔직해졌다.
이해할 수 없었던 그리고 신뢰할 수 없었던 바 팀장님을 다시 보게 했던 것은 그녀 나름의 근본적이고 용감한 소통의 시도였다. 여러 심리적 갈등들이 있었을 것임에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아주 개인적이면서도 일면 보편적인 이유를 우리 앞에 까발려 이야기하던 그녀의 행동은 정말이지 용감한 것이었다. 이후 그녀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변화가 없었을 지 언정 함께 일하기 위한 신뢰라는 최소한의 기반은 마련되었기에, 종종 나의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을 포용할 수 있게 했다. 현재 함께 생활하고 있는 지 간사님이나 서 간사님은 이에 비하면 아주 수월하게 그러한 과정을 겪어내었다. 그렇다면 최근 새로운 협력 관계를 형성해야 했던 그는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종종 진솔한 소통을 쉬이 불러내곤 하는 몇 차례의 신랄한 논쟁도 있었고 (나로서는 예외적이었던 날카롭고 직선적인 말들은 내 감정의 꾸밈없는 분출이기도 했지만 필사적인 소통의 시도였다) 또 몇 번의 다정하고자 했던 대화들이 분명 존재했다. 우리 내에서 오고 간 많은 말들은 왜 긍정적 울림을 생산해내지 못했던가. 다만 확실한 것은 그의 대답에서 나는 항상 핵심보다는 변죽을 울리는 소리만을 들었다는 점이다. 분명 그는 나의 우리의 소리를 들었다 대답했으나 그의 행동의 변화 역시 변죽을 울릴 뿐이라 느꼈다. 이러한 그의 경향은 나 이외의 타인들과의 소통에서도 그러하다 여겨졌다. 그것이 나의 그릇의 한계라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조금 엄살을 부리자면 그와의 협력 관계 형성이라는 과제는 25년 평생 처음 두드러기를 겪을 만큼 심리적으로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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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소통의 방식에 있어서의 차이는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고, 소위 그 변화라는 것 역시 입장에 따라 변화의 유무의 판단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간극을 ‘진심은 통한다’는 명제로 좁혀 보자면 결론은 그와 나는 소통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 원인이 상대적으로나마 내 쪽보다는 그의 쪽에 있었다 판단한 것은 이러한 느낌을 받은 것이 비단 나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잘잘못을 논하고 싶지는 않다. 단지 나는 이곳에 온 지 반년 남짓 된 지금 함께 일하기에 너무나도 버거운 사람도 존재하더라고 투정 섞인 하소연을 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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