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경의 바양노르에서..] 잡초를 정의하는 것

 

0817 잡초를 정의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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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 11만주가 넘는 묘목을 키워낸 우리 바양노르 양묘장은 그보다도 많은 잡초들이 빽빽이 자라나는 곳이다. 정식한 어른 나무들에야 들풀들이 보습의 효과가 있다지만, 자라나는 유치원생들은 그 작은 녀석들과도 경쟁을 해야 하는지라 비가 오는 날이면 우리와 주민들은 종종 잡초를 제거하는 작업을 한다.

 

뿌리를 내린 그보다 작은 묘목들은 어지간해서는 잘 뽑히지 않는 반면, 묘목이 자라는 속도에 비견하면 때론 무서울 정도로 솟아 자라는 잡초들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뽑힌다. 뿌리를 얕게 내린 탓이다. 손끝에 힘을 주고 잡초를 뽑는 작업에 몰두하던 주민들이 잡초 뽑기를 거부한 적이 단 두 번 있다. 토마토와 차차르간. 작년에 각각 영농 하우스와 차차르간 하우스로 썼던 온실에 올 해 다른 수종을 삽목했더니 발생한 일이었다. 삽목 전, 땅을 뒤집어 지면 아래의 뿌리들을 몽땅 골라내는 작업을 하는 데도 사람이 하는 일은 빈틈이 있게 마련인 법이다. 언제 뿌리를 내린 것인지 큰 온실 한 켠으로 어느새 크게 자라버린 토마토와 포플러 사이로 말갛게 얼굴을 내민 차차르간으로는 미래의 열매 탓인지 선뜻 손이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문득 제를릭’ (몽골어로 잡초)의 정의에 대해 묻고 싶어졌었다. 제거의 대상이 되는 잡초, 풀은 풀이되 한 풀이라. 그렇다면 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잣대는 무엇이냐고.

 

(여기서 하다는 것은 잡기라는 말에서처럼 중요하지 않음을 뜻할 수도, 혹은 잡종이라는 말에서처럼 많은 것이 섞인 상태를 뜻할 수도 있다. 어느 편이 되었건 혈통도 별 볼일도 없음 쯤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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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양노르의 들판에서는 짱고라는 식물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바닥을 기는 듯 짙고 질긴 줄기와 잎을 펼쳐 내는 녀석인데 이 녀석의 씨앗은 마치 무기라도 된 듯 날카롭다. 손톱 크기도 되지 않는 별 모양의 씨앗은 종종 슬리퍼를 뚫고 발바닥을 찌르기 일쑤다. 꽤나 성가신 이 녀석은 종종 사람들의 옷을 통해 집안으로까지 침범해 들어와 우리를 괴롭히곤 한다. 이런 쓸모 없는 녀석이 잡초일까. 글쎄, 선뜻 단정지을 수 없는 것은 사람이든 풀이든 한 개체의 성질을 규정하는 것은 그 자체의 특성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자리한 배경이라는 생각 탓이다. 자신의 자리가 아닌,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곳에 자라는 풀, 그게 잡초가 아닐까. 양묘장이 아닌 들판에 자라는 짱고식물은 성가실 망정 뽑아야 할 대상은 아닌 것이다. 반면, 포플러 양묘장의 토마토와 차차르간은 별 볼일 있는식물일지언정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 자랐다는 점에서는 잡초인 셈이다.

 

 

문득 몽골에 있는 나 자신은 잡초와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 의문이 들었다. 이 곳은 내가 뿌리를 깊게 내리고 살아오던 곳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들의 삶들 속에 녹아 들어 평생을 살아갈 곳도 아니다. 나는 몽골인 사이의 잡초가 아닐까. 묘목을 돌보는 이들의 손에 뽑혀질 잡초처럼 이곳을 찾아 무엇인가를 해보려 하는 우리들도 언젠가는 몽골을 떠나야 할 테다. 몽골인들 스스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거기다 가끔 자신들이 편한 대로 우리를 해석하고 대하는 주민들을 마주할 때면 나는 정말이지 이들 속의 나를 잡초인 마냥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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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래서는 여간 억울한 일이 아니다. 김 간사님이 언젠가 내게 이야기했듯, 우리가 이곳에서 생고생을 하는 것이야 충분히 감내할 수 있지만 이것에 아무런 의미가 없대서야 할 말이 없어지는 걸. 이 모든 노력들이 결과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이라면, 가슴이 먹먹해질 만큼 그리운 이들을 멀리 하고, 여태껏 옷깃 한 번 스치지 않았고 어쩌면 앞으로도 영영 스칠 일이 없었던 이들 사이에 들어와 매일 매일을 실랑이 하며 지내고 있는 나는 우리는 멍청이들이 아닐 수 없다. 나의 자리가 아닌 곳에 일시적으로 자리한 내가 잡초가 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렇다면 필요로 하는 풀이 되는 길이다. 긴 시간 앞에서 나무보다는 한참 빨리 사라질, 하지만 그 나무가 잘 자랄 수 있는 수분을 머금는 역할을 해주는 조림장 내의 잡다한 들풀들처럼.

 

그리고 나를 필요로 해야 하는 대상은 나와 동시대를 아웅다웅 살아가는 우리 주민들 차원의 사람들보다는 훨씬 더 거시적인 그리고 집합적인 의미의 사람들이 아닐까. 오늘 주민들과의 실갱이에 조금쯤 날이 선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이 그렇게 멋대로 해석하고 행동할 거면 나는 사라 박시는 이곳에 왜 있는 것이냐고. 들풀이 되려면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하는지 모른다. 사사건건 잡초들과 경쟁하려 드는 이 작은 묘목들이 그러한 잡초들로부터 조차 이득을 얻을 수 있는 큰 나무가 될 때까지. 비록 지금 우리의 크고 작은 고생이 키워낼 나무를 목격할 수야 없을지언정, 사상의 눈으로 그것을 그리고 기다릴 수 있는 법을 터득해나가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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