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경의 바양노르에서..] 소원, 사람들의 마음의 보편성

 

0815 소원, 사람들의 마음의 보편성

 

 

 

주민들은 주섬주섬 준비해온 물품들을 꺼냈다. 파란 천, , , 쿠키와 사탕, . 어떤 이들은 이라는 전통 의상을 꺼내 입었다. 차례 차례로 세 번을 돌려야 한다는 사각형 나무 틀에 걸린 통을 돌리고 정해진 길을 따라 엄마 바위가 놓인 원형 돌벽 안으로 들어갔다. 누군가는 탁자 위에 여럿 놓인 향들 틈으로 그들의 향을 새로이 켜고, 누군가는 엄마 바위 앞쪽의 그릇에 과자를 담고, 누군가들은 쌀과 술을 공중으로 흩뿌린다. 말끔히 몽골 전통 의상을 입은 엄마 바위에 몽골의 풍습 대로 파란 천을 걸어주는가 하면, 바위에 손과 머리를 대고 한참을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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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과 에지 하드’ (엄마 바위)라는 곳에 다녀왔다. 올 한 해, 무지막지하게 많은 나무를 심고 관리한 우리 주민들에게 푸른 아시아가 내린 일종의 포상 휴가인 셈이다. 3번을 방문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엄마 바위, 그들에게는 그 마지막 방문이었다. 작은 미크로 버스 두 대에 서른 명 남짓한 사람들과 그들의 짐들을 나누어 싣고 비포장 길을 여섯 시간 이상 달려 도착한 목적지 근처 들판에선 양고기 허르헉을 해 먹고 노숙을 했더랬다. 그렇게 찾은 새벽의 엄마 바위.

 

무슨 소원들을 빌고 있을까. 문득 두 눈을 꼭 감고 하늘을 향해 병 뚜껑에 조심 조심 따른 보드카를 하늘을 향해 뿌려대는 잉크 자르갈 아주머니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저들은 무슨 소원이 저리도 간절해 이곳을 그리도 찾고자 했을까 궁금해졌다. 지 간사님은 소원이야 다 똑같지 했다. 다들 자식 걱정, 가족 걱정 아니겠냐면서. 그럴까, 모두들 다 똑같을까. 그래서 누군가는 노래의 제목을 보편적인 노래라 지었던 걸까. 그러고 보니 잉크 자르갈 아주머니의 아기는 많이 아프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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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5년 전 겨울 이탈리아의 한 성당에 봉헌 초를 켜면서 되 뇌인 내 짧은 기도가 떠올랐다. 당시 한참 병환에 계셨던 외할머니를 기억해주십사 하고, 외할머니의 마음이 지금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4년 후 외할머니는 돌아가셨고 나에게는 조금 더 자주 찾아 뵐걸 하는 후회만이 남았다. 알츠하이머와 합병증. 기억들을 잃어 의식 중간 중간이 비어버린 이후에도 첫 손녀인 내 이름만은 기억해주셨고, 내가 세상에서 처음 했던 많은 것들을 함께 해주셨던, 내가 그리도 당신의 자랑이어서 주변 이들에게 내 자랑을 달고 다녔다던 우리 할머니의 임종을 나는 지키지도 못했었다. 하필이면 그 때 간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올라 입원했던 할머니의 큰 딸인 우리 엄마도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했다. 할머니의 막내 아들 외삼촌 역시 경기도에서 부랴부랴 내려오던 그 길이었다. 수녀님인 이모만이 지킨 병상에서 할머니는 생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것을 조금쯤 두려워하셨단다. 핸드폰에 무심한 나는 엄마의 전화를 놓치고 다음날 아침에서야 소식을 전해 들었고, 다음 날 아침 굳이 학교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출발을 한 것을 그래야 외할머니가 기뻐하실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덕분에 마지막 얼굴도 못 뵌 내가 병원에서 처음 본 광경은 나를 보고 무너지는, 외할머니를 닮은 우리 엄마였다. 그 겨울, 그렇게 그렇게 다잡았던 마음은 몽골에 온 초반 가끔 가끔 부풀어오르다 터지곤 했다.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으니 다 아물었을 리가 없다. 다만 나는 언제나 철벽처럼 강인했던 외할머니가 겪었을 아픔들을 진작 보지 못했던 것이, 항상 나를 챙겨주셨던 외할머니가 당연해 내가 챙겨드리지 못했던 것이 죄스러웠다. 바이라 팀장님의 할머니를 우연히 뵙게 되었던 날. 강 간사님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던 날 마음이 먹먹해졌던 것은 내 외할머니께 전하지 못한 마음들이 너무 많아서였다. 모처럼 진지하게 의식을 행하는 주민들의 마음 틈에 슬그머니 내 마음을 밀어 넣었다. 많이 감사했다고, 많이 많이 보고 싶다고, 할머니가 기대했듯 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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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 불교가 되었건 카톨릭이 되었건 의식이라는 것은 마음의 표현이다. 카톨릭의 향 치는 의식이 그 연기를 통해 하늘을 향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뜻하듯 우리 주민들이 피운 향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차이가 방식이라면 핵심은 언제나 공통인가보다. 지난 달 즈음 윤 지부장님께서는 서로 가까워진다는 것은 공통점을 발견하는 일이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공통적인 면이 있는 사람들끼리 친해지기가 쉽다고. 지 간사님과 나는 주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라는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타인과의 소통에 열려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하시면서, 그래서 보완적인 방향이긴 하나 우리 둘의 호흡이 맞는 편인 거라 해석하셨다. 이에 나는 친밀해진다는 것은 결국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던가 반문했다. 하지만 마음 한 켠으로 그러한 차이를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공통됨이 아니던가 속으로 되물었다. ‘보편이라는 말이 때로는 차이의 존재의 근거를 부정하기 위해 쓰이곤 하기에 그다지 선호하지는 않지만, 인정한다. 우리 모두의 제각각 다른 삶의 방식들을 관통하는 보편적인무엇인가가 있음을. 그리고 내가 몽골에 온 것 역시 그러한 보편의 가치를 향한 것임을. 그리고 우리 외할머니는 당신의 손녀 딸이 몽골 땅에서 하고 있는 일에 분명 기뻐해주셨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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