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경의 바양노르에서..] zero-sum-game, 그리고 나무와 사람의 차이

 

0805 zero-sum-game, 그리고 나무와 사람의 차이

 

 

 

전지 작업을 하다가 문득 나무 하나를 이루고 있는 이 가지들도 결국엔 제로섬 경쟁<※제로섬 게임(게임 이론에서 참가자 각각의 이득과 손실의 합이 제로가 되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전체 합이 0은 아닌 지라 엄밀히 말하자면 제로섬은 아닐 테지만, 그 합을 상수로 두고 그 상수에 ‘0’을 대입한다면 굳이 제로섬이라는 익숙한 용어를 빌릴 수 있지 않을까나) 메마른 몽골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일정하게 주어지는 물을 나누어 먹기 위해서, 한 나무를 이루는 여러 가지들은 필연적으로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렇다면 짧은 생장 기간 동안 겨울을 날만큼 튼튼히 그 녀석들을 키워내야 하는 우리들은 조금쯤 영악하게도 선택적으로 한 가지만을 튼튼히 키워내야 하는 것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의 고리를 잇다 문득 이러한 전지작업의 목표가, 온난화라는 커다란 패러다임 속에서 사막화나 황사와 같은 현상들에 대응할 수 있는 희망인 나무를 키우는 사람이 행사하는 법칙이라고 하기에는 조금쯤 이율배반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다른 가지들을 희생시키고 선택적으로 한 가지만을 튼튼히 키워낸다는 그 전제가 왠지 하루 평균 10리터 물을 쓰는 몽골인들 덕분에 일일 각 356리터의 물을 사용할 수 있는 한국인들의 물 남용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어서였다.

 

비단 물 사용의 영역뿐 아니다. 생활용품 구매에서부터 전기 사용 등 거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한국인들의 풍요로운 소비를 가능케 하는 것은 뒤집어보면 전체 총량을 상수로 유지시키는 (‘제로섬이라는 용어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자면) ‘마이너스소비를 하는 몽골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조림의 법칙인 전지 작업의 관점에서 일반화하자면 지구를 잘 키워내기 위해서는 어느 한 쪽을 제거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리라. 하지만 통상 이러한 명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우호적으로 수용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나무와 사람 간에 공통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양 측의 제 1의 목표를 생존이라는 동일한 개념으로 설정한다 할지라도 그 구체적인 달성 방법에 차이가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학창 시절 종종 교과서에 등장하던 인간의 존엄성쯤이 될 것이다. (현대 주류 과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되어 온 인간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개별 개체 간의 선택에 대해서는 히스테릭적인 거부 반응을 보이는 셈이다.)

 

 

그렇담 이러한 전지 작업의 폐해를 방지할 수 있는 수단은 언젠가의 몽골이 선택했던 공산주의라는 체제가 될 수 있을까 다시 한번 나의 공상은 허공으로 튀었다. 과연 그것은 인간의 존엄을 추구하는 가장 뛰어난 수단이었던가. 모두에게 동등한 양의 에너지를 (모든 것은 에너지로(야말로) 환원될 수 있지 않을까) 분배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담화 속에서는 모든 가지들이 같은 양의 물을 제공 받을 것이고 모두가 적어도 행복의 재료에 있어서는 똑같이 평등하다. 이후의 성장에 어떤 변수들이 작용할 지를 차후의 문제로 돌린다면, 모든 가지들은 똑같이 쑥쑥 자라날 가능성을 부여 받는 셈이다. 하지만 전체는 개인을 위해, 개인은 전체를 위해라는 순환론적 이상이 표상하듯 개인의 존엄은 곧 전체의, 즉 모든 개별 가지들을 어우르는 나무의 존엄과 직결될 테고, 나무가 어떻게 될까 하는 질문은 곧 역사적으로 공산주의는 어떤 결말을 맞이했던가 하는 답으로 이어질 테다. 누군가 파이의 크기를 통해 설명했듯, 개인 간의 평등을 추구하던 공산주의 국가들은 타 국가들과의 경쟁에서 뒤쳐져 국가의 차원에서는 존엄을 획득하지 못했고 (어떤 측면에서 경쟁은 삶의 가장 기본적인 규칙이고 여기서 정의로운 규칙이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공산주의 국가는 가능했던지 모르지만 공산주의 세계는 결국 그렇지 못했으니까) 이는 결국 개개인의 존엄의 상실로 이어졌다. 실제로 현재 이 이념을 맹신하는 마지막 주자인 북한의 인민들은 많은 인권주의자들의 동정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름이 가물가물해진 저명한 학자가 역사의 종말이라 칭했듯 소위 공산주의에 승리했다 여겨지는, 그리고 지금 이순간 종횡무진 전 세계를 물들이고 있는 자본주의는 어떨까. 진화의 기제인 학습을 가능케 하는 보상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가장 인간의 본성에 충실하다고도, 그리고 그 덕분에 개인의 존엄이 가능한 파이의 전체 크기를 키웠다 여겨지기도 하지만, 역사라는 긴 시간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면 이 파이 역시 결국에는 제로섬의 영역에 속하는 상대적인 개념에 불과하다. 풀어 이야기하자면, 현재 파이가 커졌다는 것은 미래의 파이가 그만큼 줄어듦을 의미한다는 뜻이다. 얼마 전 서브 프라임 모기지로 인한 공황이 그러했듯 지금의 번영은 아마도 십중팔구 거품이고 환영이다. 현대 세대의 (물론 이 현대에 경계를 짓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일 테다) 과잉과 남용이 지금의 온난화를 불렀을 터이다. 이 덕분에 우리의 미래 세대들은 현재의 플러스에 대응하는 마이너스를 경험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 읽었던 이라는 책의 저자는 자본주의라는 녀석에 zero sum을 넘는 어떤 이상을 이야기했지만, 나는 그것이야말로 이상이 아닌 허상이라 생각한다. 이상도 현실을 벗어날 수는 없는 법이다. 아주 기본적인 개념에서부터 그러하기는 하지만, 파이가 커진다는 말도 이 이념을 정당화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어떤 각도(물론 아주 거창하기까지 하다)에서 이러한 자본주의와 닮은 꼴인 전지 작업은 사람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그렇다고 그에 대항해왔던 공산주의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나무 가지를 치는 소소한 작업에서 비롯된 나의 이 기나긴 공상은 어쩌면 나무를 사람 한 개체로 보느냐, 아니면 가지를 그것으로 보느냐 하는 관점에 따라 전개가 달라지는, 그저 구구절절 풀어놓은 말장난에 불과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방으로 중구난방 튀어대는 나의 의식의 흐름을 나름으로 관통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나름의 믿음일 것이다. 흔히들 이념을 이상을 추구하는 학문적 도구라 여기지만, 인간의 존엄 혹은 행복이라는 이상은 기본적으로 이념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3차원인 인간의 세계에서 모든 것은 양면(혹은 그보다 많은 수의 면)을 통해서만 온전한 하나가 존재할 수 있겠으나 개인적으로 나는 논리적인 이성보다는 그렇지 못한 감성이 이 이상에 조금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다고도 본다. 무엇보다 나는 인간에게는 경쟁의 본능에 더해 더불어 사는 본능도 있다고 믿는다. 2000여 년 전 사랑을 인간의 본질이라 정의했던 예수라는 이의 말은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리며 그 힘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푸른 아시아가 심는 나무들이 내게 희망인 이유는, 지구라는 한 나무의 가지들인 몽골과 한국이라는 나라의 경쟁에 대한 해답으로 (현재의 상태에 대한 주류의 판단에 따르면) 상대적으로 약한 몽골이라는 가지를 쳐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의 공존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것도 조금 더 평등하고 조화로운 방향으로, 그리고 꽤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으로. 나의, 너의, 우리의 열정이라는 에너지는 너를, 나를, 우리를 향해 변화한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변화는 엔트로피의 법칙에 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다시 한번 허공에 뜬 상념. 이 작은 에너지는 변화를 거듭하면서 무용화되기보다 가용화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이 작은 희망의 막강한 힘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나누는 마음은 불편을 무릅쓰게 한다. 나의 이기적인 행동들을 반성하게 하고, 책임 의식을 갖게 한다. 이곳에서 나무를 심는 일은 나누는 마음을 몸소 실천하는 일이다. 제로섬이라는 공식 속의 나의 짝에게 나의 이기를 사과하고 감사하는 일이며, 이러한 나의 마음을 행동하는 일이다. 여기에 희망이 있고 꿈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서 일하는 것에 감사하고 행복하다.

 

물론, 그것의 아주 말단 작업의 성격이 (개개 가지를 사람이라 본다는 가정 아래) 이러한 지향성에 반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얄미운 매력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