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경의 바양노르에서..] 개별성과 보편성, 충돌

 

0717 협력이 어려운 이유 IV: 개별성과 보편성, 충돌

 

 

 

두터운 구름 뒤로 별들이 모조리 자취를 감춘 까만 밤, 두고 온 짐을 찾으러 조림장으로 향하던 길, 관계 역동에 관한 나의 하소연에 대한 답으로 지부장님은 사람은 결국은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기에 서로에게서 궁극의 공통점을 찾는 여정이 바로 관계를 맺는 일이라 하셨다. 나는 반문했다. 오히려 친밀해진다는 것은 곧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개개인이 각자의 입장에 서있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 입장이라는 녀석이야말로 개개인의 고유성과 특성을 결정하는 요소인지 모른다는 사실, 따라서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입장의 교류일는지 모른다는 나름의 해석. 이런 것들은 나의 생각의 패턴에 꽤나 깊숙이 깔려있는 전제이니까. 글쎄, 나의 이러한 반론에 지부장님은 다시금 본인의 입장을 고수하셨다. 생물학적으로 동일한 데다 결국에는 생물이라는 용어로 싸잡아 정의되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 아니냐고.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나는 그의 견해를 (100% 동의하지 않을지언정) 인정했다. (‘듣는경향이 강한 수용적인 사람이 아닌 말하는 데 능한 공격적인 이들은 분명 동의하지 않는 의견에 저돌적으로 부딪혔을 테다. 길고 긴 언쟁을 감내하고서라도.)

 

 

5년이라는 연애 기간 동안 내가 고수해온 철칙 같은 것은 그의 몸에 밴 생각을 행동을 굳이 억지로 바꾸려 들지 말자는 것이었다. 이는 곧 그가 나에게 역시 같은 태도를 가지기를 기대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그 오랜 기간 동안 여러 면에서 비슷해진 우리는 그간의 시간을 통해 자연스럽게 서로의 가치관의 영향을 받아온 셈이 되었지만. 어쨌건 나는 기본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정한 (칼릴 지브란은 바람이 지나다닐 수 있다 표현하는) 거리가 확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부장님의 말씀을 곱씹다 문득, 이러한 개개인의 차이는 개인이 삶을 살아내는 방식에 해당되는 특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방식 이면의 본질은 누구나 동일한 보편적인 것일 수 있다. 예를 들면 사람간의 차이가 중요하다는 나의 입장과 공통점이 중요하다는 지부장님의 그것 간의 차이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무엇인가를 충족시키려는인간 보편적인 욕구를 구체화하는 관계 맺는 방식의 차이일 수 있다. 내가 즐겨 곱씹곤 하는 윤 신부님의 사자와 소의 이야기로 말할 것 같으면, 사자는 고기를 좋아하고 소는 풀을 좋아하지만, 그 둘이 그러한 양식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결국 동물이 갖고 있는 식욕의 충족인 것이다. 따라서 사자와 소의 우정은, 공통점을 찾아내기 위한 투쟁과 차이점을 인정하는 수용이라는 상호모순적인 과업을 충족하는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공통된 꿈을 실현해내기 위해서는 지부장님의 말마따나 투쟁이 필요하다. 그저 차이를 인정한 채 끝난다면 협력은커녕 아무런 일도 추진되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치열한 근본에 대한 고민과 의견 교류가 없는 그저 형식적인 중재는 그저 무력한 관행의 반복만을 낳을 뿐 긍정적 진보를 낳은 힘이 부족할 테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동시에 개개인의 개별적인 방식 역시 인정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라는 나의 의견에는 변함이 없다. 자신이 생각하는 견해를 섣불리 보편적인 것인 것이라 판단한다면, 종종 대화는 앞도 뒤도 없는 일방적 공격 혹은 비난으로 흐르니 말이다.

 

 

 

대표적으로 내가 종종 이러한 보편성에 의한 개별성의 침해를 목도하는 것은 대화 상황에서이다. 한 사람의 가치관과 입장은 종종 말투와 말을 할 때의 분위기 등에 의해 아주 미묘하고도 정확하게 전달된다. 개인의 개성을 무시할 정도로 강한 언어는 물리적 폭력보다 더 폭력적으로 내게 다가오곤 한다. (한창 왕따라는 현상이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던 여중생 시절, 학교 주위를 수놓았던 언어 폭력 근절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이라는 녀석은 추상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전달하는 매개일 뿐이면서도 이따금 그 자체만으로 그를 능가하는 힘을 발휘하기도 하고, 마음 한 켠을 차오르게 만들기도 또 채워있던 마음을 공허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한 사람의 기분을 좌우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 사람이 어떤 상황 혹은 행위에 의미를 느끼게 하기도 하고 공허감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이것이 말이 갖고 있는 일면 폭력적인 힘이다. 타인에 대한 예의를 포기하고서 까지 추진력에 무게를 둬야 하는 지는 미심쩍은 문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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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떠들썩한 자리는 종종 오히려 침묵을 그리게 한다. 물론 모든 떠들썩함이 공허한 것은 아니지만, 입 발린 이야기들로 가득 찬, 혹은 듣는행위가 부재하는 대화의 장만큼 마음을 허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나는 모든 말을 거는 혹은 말을 하는 행위가 대화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쯤 공격적이라 하여 그것이 모두 개별성의 침해는 아닐 터이다. . 협력이라는 목표는 아직은 내게 아주 버겁고 힘겨운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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