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경의 바양노르에서..] 여유와 열정, 그 상관관계에 관한 단상

여유와 열정, 그 상관관계에 관한 단상

201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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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전형’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해석해내곤 한다. 그리고 이 프리즘의 단면 속에서 육체적인 평안은 종종 정신적인 열정과는 음의 상관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비춰진다. 영화에서 혹은 소설이 그려내는 위대한 업적을 성취한 이들은 종종 가난하고 척박한 환경에서 자신의 열정을 불태워 무엇인가를 이루어낸다. 굳이 일컫자면 ‘헝그리 정신’ 쯤 될 수 있을까.. 사회에 변혁을 이루어낸 예술가나 정치가, 학자 등의 열정은 언제나 배고프고 목마르다. 반면, 이미 사회의 상층에 편입되어 현실적인 걱정들로부터 자유로운 이들은 현실에 안주하여 꿈을 좇는 데 게으르다. 그렇다면 그러한 어두운 배경은 ‘열정’이 ‘뜨겁기’ 위한 조건이 되는 걸까. 아니면 (경제적, 시간적) 여유와 열정 사이의 이러한 반비례 관계는, 강인한 영혼을 가진 특정 소수의 예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말하자면 일반화할 수 없는 픽션의 ‘전형’에 불과한 걸까. (물론, 부나 권력을 좇는 ‘열정’도 ‘열정’이라 본다면 이러한 나의 정의는 달라질 지 모르겠다. 그러한 측면에서는 오히려 가진 사람들의 더 가지려는 마음이, 가난한 이들의 그것보다 더 크기도 하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측면에서는 열정이 여유에 반한다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두 개념의 성격 개념 자체 간에 공통 분모가 적은 탓일 것이다.)

갑작스레 내가 열정의 조건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아마도 몸소 경험하고 있는 NGO 사업이 그리고 이를 이끌어가는 이들이 ‘배고픈’ (굳이 부연하자면, 경제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여유에 고픈) 길을 가고 있다 느꼈기 때문이다. 이는 주류가 걷는 대로가 아닌, 새로운 ‘대안’이라는 샛길을 걷는 NGO의 특성 상 일면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거니와 실제로 좇는 이상 자체가 (많은 부분 개인의 안녕이 근거하는) ‘부’와는 거리가 먼 탓일 터이다. 그리고 실제로 지부장님을 필두로 한 ‘푸른 아시아’를 꿈꾸는 이들의 삶은, 그 열정은 내가 느끼기에 여느 영화나 소설 못지 않다. (지부장님의 시간은 정말로 주 7일 하루 24시간을 일에 쫓기고 사람에 쫓긴다.) 몽골에서의 나의 삶 역시 이 테두리를 크게 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의 열정에 있어 이러한 현실적 여건이 어떤 영향을 주느냐 하는 것이다.

과거에 내가 어떠했다 해석하는 일은, 어쩌면 현재와의 연속성보다는 차이를 인식하는 일이다. 틈만 나면 과거로 향하는 나의 의식의 흐름 속에서 기억은 종종 미화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완전하나마 그 기준이 없다면 현재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어떻게 반추하느냐 하는 문제는 동시에 현재의 내가 현재의 나를 어떻게 파악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과거를 인식하는 방식은: 얼마 전, 바양노르로 내려와서 처음 썼던 일기를 뒤적이다가 첫 작업 때의 내가, 내 기분이 얼마나 반짝반짝 했던 지를 새삼 되짚어보게 되었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그것도 그 최전방인 몽골 현장에 있다는 인식에서 오는 가슴 벅참은 이전까지의 내가 살았던 방식과는 아주 이질적인 삶의 틀 속에 나를 맞추는 일도, 이제껏 내가 훈련된 익숙한 일과 다른 일을 진행하면서 나의 미숙하고 서투른 면을 대면하는 일도 쉽사리 버틸 수 있게 했으니까. 나에게 있어 열정은 그런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현재: 최근 나는 주민들과 회의를 하는 나를 지 간사님을 관찰하다 문득 사람들과 우리의 상호 작용이 이전과 달라졌다 느꼈다. 우리와 주민들의 소통은 종종 주민들 앞에서 우리 자신을 코미디언이라 정의할 만큼 통상 유쾌하고 즐거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일들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꽤나 방전되었고,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귓가로 정신 없이 밀려드는, 주민들의 요구가 빽빽한 그 외국어들을 흥미롭게 귀 기울이기에 나는 꽤나 지쳐있었다. 얼마 전 워크샵은 나로 하여금 그러한 나의 심리 상태를 아주 극적으로 대면케 했다. 먹구름이 뭉글 뭉글 생겨나다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을 때면 한 번씩 터지곤 하는 천둥과도 같은 내 감정 곡선의 밑바닥을 경험하는 일은 언제나 그렇듯 조금쯤 당혹스럽고 조금쯤 불쾌하다. 여러 차원의 여러 이유들이 한 켜 한 켜 쌓였을 터였지만, 무엇보다 내게 있어 휴식 시간이 부족했다. 그저 몸이 마음이 가만히 앉아 숨 쉴 공간이 정말이지 아주 절실하게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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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주 5일제는 이제 사람들이 누리는 당연한 권리와도 같아졌다. 이는 ‘기초 생활 보장’이나 ‘의료 보장’과 같은 복지 정책의 일환일 것이며, 이러한 복지의 법적 근거는 고등학교 법과 사회 시간에 등장했던 ‘자연법’ ‘인권’ ‘행복할 권리’ 쯤이 될 테다. 그렇다면, 현재 시도되고 있는 여러 형태의 ‘복지’ 제도는 일종의 행복의 외부적 조건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서부터 삶의 목적으로 칭해지는 행복, (나는 이것을 성취한 상태의 문제라기보다 그것을 성취하는 과정의 문제라 정의하고 싶다. 그렇기에 행복 그 자체보다 중요할 수 있는) 그것을 추구하는 힘을 ‘열정’이라 본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런 휴일을 일종의 삶의 윤활제로서 필요하다 여기고 있는 것이다. 연예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열정이 지속되기 위해서 재충전의 시기가 필요하다 정도가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열정’과 관련해 이중적인 ‘전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앞서 언급한 ‘배고픈 성취가’의 이미지와 ‘안식일’이라는.

현대의 상식이라는 측면에서 흔히 법과 종교는 각각 물리적인 공간과 정신적인 공간을 지배한다 여겨진다. (물론 초기 그리스도 교회 시절의 안식일의 경우에서처럼, 고대에 종교는 법의 공간마저도 포함하는 것을 수 있다. 언젠가 어느 신학 강의에서 교수님이 말씀하셨듯, 깨달음은 이성적 언어로 설명 가능한 영역과 그것이 불가능한 비논리적인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에 들어 종교는 과거보다 조금 더 후자 쪽으로 기울여 이해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도에 기반한 주 2회의 휴일을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종교의 공간에서 강조되곤 하는 ‘심리적 여유’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을까. 나를 돌이켜 보건 데, 물질적 물리적 여유가 결핍된 공간에서 나의 첫 마음, 그 열정을 그대로 간직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나는 결국 뛰어난 소수이기보다는 평범한 다수에 속하는 인간인 것이다. 다만, 신화에 속할 수 없는 범인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전 김 과장님의 메세지처럼 ‘도를 닦는 마음’을 갖는 것인지 모르겠다. 첫 마음을 지켜내는 일은 생각보다 녹록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나는 미숙한 자신을 인정하고 그곳에서 한 걸음을 더 내디뎌야 하리라. 끊임없이 처음의 열정을 곱씹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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