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했던 2017년이 저물고, 2018년이 밝았다. 2018년이 된지도 보름이 더 지났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Шинэ оны мэнд х?ргэе(신 엉니 민드 후르기)-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를 말하기에도 조금은 민망해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만나는 사람들에게 최대한 인사를 건네고 싶은 요즘이다. 조금이라도 더 인사를 건네고 싶어서, 조금이라도 더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이 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와 닿고 있으니까.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전부 다 푸른아시아와 함께 했던 날들이었다. 대체로 지부 사무실로 출근하는 다른 단체들과는 달리 단원들만 현장으로 파견되는 푸른아시아의 특성상 교육 일정이 매우 길기 때문이다. 1월 초부터 매일 본부 사무실로 가서 교육을 받았었다. 그때는 동기 단원들과 서로 어색해서 장난치기도 머쓱했었는데. 저 오빠가 오빠인지 아빠인지, 저 언니가 언니인지 엄마인지 모르게 편한 사이가 되어버린 지금에서는 사실 잘 상상도 되지 않는다. 아무쪼록 1월부터 자체 국내교육을 받았었고, 2월에는 KCOC 합숙 국내교육을 받았었고, 3월에는 비자 문제로 출국이 늦어져 추가 국내교육까지 받았었다. 이제 떠난다며 많은 사람들에게 다 인사를 했었는데, 출국이 늦어져 다시 얼굴을 보게 되니 얼마나 민망했던지. 하지만 지금은 다 웃으면서 추억할 수 있는 해프닝들이다.
3월 중순, 드디어 몽골에 입국했던 그 날이 여전히 생생하다. 원래는 2월 말에 출국을 했어야했는데 계속해서 출국 일정이 늦어져 단원들 모두가 손꼽아 기다렸던 그 날이었다. 1년간 험한 곳 간다며 걱정하시고, 출국 전 마지막 모습 보겠다며 아침부터 집으로 찾아오셨던 할아버지의 모습부터 출근을 했음에도 짬을 내어 집으로 와 나를 배웅해주던 언니의 모습, 공항으로 나를 태워다주실 때, 목이 메어 기도를 하지 못하셨던 아빠의 모습, 딸내미 가기 전에 먹고 싶은 거 다 먹으라며 이것저것 사주시던 엄마의 모습까지. 너무나 과분하게 관심 받고, 또 사랑을 받았던 날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나를 지지해주는 가족들의 존재가 몽골 생활에 있어 항상 힘이 되어주었다. 그 힘을 바탕으로 3월 현지 교육까지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고.
아, 어쩌면 현지 교육 때가 가장 복작복작 즐거웠던 것 같다. 몽골에 와서 보게 되는 모든 것이 새로웠고, 또 흥미로웠으니까. 그리고 단원들과 숙소에서 매일 밤 수다파티를 벌였으니까. 그 시간 속에서 남으로 시작한 우리는 점점 가족이 되어갔다. 국내교육 때 했었던 라이프 쉐어링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깊은 라이프 쉐어링을 하기도 했고, 그러면서 퍽 자주 울기도 했다. 그 안에서 서로에 대한 친밀함이 쌓이고, 신뢰가 쌓이고, 애정이 쌓여갔다.
4월이 되어 처음 돈드고비로 내려온 첫 날, 이삿짐을 옮길 때부터 참 우여곡절이 많았다. 집을 골랐을 때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여러 하자들도 발견되었고 그러면서 참 스트레스도 많이 쌓였었다. 집에서만 우여곡절이 많은 게 아니었다. 조림지 업무 역시 모든 것이 새롭다 못해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었기에, 조심에 조심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1월부터 수많은 교육들을 받았지만, 막상 현장에서 적용하려니 모르는 게 너무나도 많았다. 그러면서 ‘감사병’도 생겼었다. 도무지 감사할 것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도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병이었다. 4월은 참 그 병으로 버텼었던 것 같다.
5월이 되면서 점차 돈드고비 생활에도, 조림지 업무에도 익숙해져 갔다. 그러면서 ‘감사병’도 점차 사라져갔다. 물론 너무 과한 감사‘병’은 좋은 게 아니지만, ‘감사’가 점점 줄어드는 것도 좋지 않은 일이었다. 조금씩 매너리즘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매너리즘은 6월에 절정을 찍었다. 4월, 5월 적응기간에는 너무나도 순식간에 지나가버리던 조림지 일상이 6월에는 정말 느리게 흐르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는 나만 느끼는 게 아니었다. 다른 단원들도 비슷하게 매너리즘을 느끼고 있었다. 흔히들 말하는, KCOC 국내교육 때도 들었던 ‘3개월 징크스’인 것 같았다. 그 매너리즘을 벗어나는 방법은, 솔직히 특별한 건 없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답답한 그 마음을 받아들이려고 했고, 그나마 내가 찾았던 방법은 ‘개발협력’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었다. 물론, 잘 되지는 않았지만 개발 관련 책을 읽으려고 노력했고, 다른 단원들과 인사이트를 나누고자 메일을 주고받았다. 또한 단체 홈페이지에 작성하는 단원 에세이를 진지하게 쓰고자 노력했다. 그러면서 하루하루 시간이 흘렀던 것 같다.
조림지 업무에서 제일 힘든 게 뭐였냐고 묻는다면 단연 관수였다. 다른 지역의 조림지들은 호스 관수도 많이 하던데, 내가 파견된 돈드고비는 ‘고비 사막’ 근처라는 지역의 특성상 물이 적어 호스 관수를 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12L 양동이 두 개를 들고 낑낑거리며 관수를 했다. 물론 주민직원분들처럼 8시간 내내 관수는 하지 못했다. 이 점이 내게는 참 고민거리였다. 나의 체력에서 8시간 풀타임 관수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외에 할 일이 없었다. 특히 여름에는 정말 관수밖에 할 일이 없던 시기라 참 난감했다. 그러면서 스스로 타협도 많이 하게 되고, 여러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스스로의 나약함을 뼈저리게 목도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매 순간 최선을 다했냐고 묻는다면 사실 그렇게는 말하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그 순간의 선택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이 때로는 자기합리화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비판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비난이 되기도 했었지만 말이다.
4월에 신규 8조림지 울타리를 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던 조림 사업은 10월 20일을 기점으로 막을 내렸다. 단원 생활의 가장 핵심사업인 조림 사업이 마무리 된다는 게 참 마음이 헛헛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뿌듯하기도 했다. 어쨌든 별 탈 없이 한 해의 사업을 잘 마무리했구나 싶어서, 2009년부터 시작된 돈드고비 조림지라는 선속에서 2017년의 점을 내가 끊지 않고 잘 이었구나 싶어서. 심한 가뭄 속에서도 잘 견뎌내 준 나무들과, 열심히 함께 조림지를 가꿔주신 주민 직원 분들에게 참 감사한 마음이다.
11월부터 지금까지 겨울 주민 자치사업으로 컴퓨터교육과 한국어 교육을 병행해 오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교육을 진행할 날들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앞으로 남은 수업 일수들이 한 손에 꼽힐 정도이기 때문이다. 이제 마지막 남은 건 유종의 미를 잘 거두는 것. 크게 욕심 부릴 것 없이, 처음 목표했던 것들만 잘 마무리하고 갈 수 있도록 해야겠다. 요즈음 뒷심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참 많이도 했었는데, 에세이를 작성하며 더 뼈저리게 느껴진다. 처음 NGO 봉사단원을 희망하고, 꿈에 부풀어 지원했던 그 당시의 마음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봐야겠다.
지난 2017년을 되돌아보면, 참 여러 가지를 얻어가기도 하고 그만큼 내려놓기도 하는 한 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장기봉사활동을 통해서 보길 원했던 국제개발협력의 민낯을 조금은 알게 되는 한 해였다. 너무 조금 알게 되어서 더 깊게 알아가고 싶은 욕망이 아직도 마음에 많이 남아있지만 말이다. 이 욕망을 계속 잘 간직하다가, 다음에 다시 한 번 더 장기봉사단에 지원해 볼 생각이다. 아, 그 때는 ‘조금 더 잘 해야지’ 라는 생각을 덜 할 것 같다.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지’라는 그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게 무엇인지 조금은 깨달았으니까.
다사다난했던 2017년이 저물고, 2018년이 밝았다. 2018년이 된지도 보름이 더 지났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Шинэ оны мэнд х?ргэе(신 엉니 민드 후르기)-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를 말하기에도 조금은 민망해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만나는 사람들에게 최대한 인사를 건네고 싶은 요즘이다. 조금이라도 더 인사를 건네고 싶어서, 조금이라도 더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이 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와 닿고 있으니까.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전부 다 푸른아시아와 함께 했던 날들이었다. 대체로 지부 사무실로 출근하는 다른 단체들과는 달리 단원들만 현장으로 파견되는 푸른아시아의 특성상 교육 일정이 매우 길기 때문이다. 1월 초부터 매일 본부 사무실로 가서 교육을 받았었다. 그때는 동기 단원들과 서로 어색해서 장난치기도 머쓱했었는데. 저 오빠가 오빠인지 아빠인지, 저 언니가 언니인지 엄마인지 모르게 편한 사이가 되어버린 지금에서는 사실 잘 상상도 되지 않는다. 아무쪼록 1월부터 자체 국내교육을 받았었고, 2월에는 KCOC 합숙 국내교육을 받았었고, 3월에는 비자 문제로 출국이 늦어져 추가 국내교육까지 받았었다. 이제 떠난다며 많은 사람들에게 다 인사를 했었는데, 출국이 늦어져 다시 얼굴을 보게 되니 얼마나 민망했던지. 하지만 지금은 다 웃으면서 추억할 수 있는 해프닝들이다.
3월 중순, 드디어 몽골에 입국했던 그 날이 여전히 생생하다. 원래는 2월 말에 출국을 했어야했는데 계속해서 출국 일정이 늦어져 단원들 모두가 손꼽아 기다렸던 그 날이었다. 1년간 험한 곳 간다며 걱정하시고, 출국 전 마지막 모습 보겠다며 아침부터 집으로 찾아오셨던 할아버지의 모습부터 출근을 했음에도 짬을 내어 집으로 와 나를 배웅해주던 언니의 모습, 공항으로 나를 태워다주실 때, 목이 메어 기도를 하지 못하셨던 아빠의 모습, 딸내미 가기 전에 먹고 싶은 거 다 먹으라며 이것저것 사주시던 엄마의 모습까지. 너무나 과분하게 관심 받고, 또 사랑을 받았던 날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나를 지지해주는 가족들의 존재가 몽골 생활에 있어 항상 힘이 되어주었다. 그 힘을 바탕으로 3월 현지 교육까지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고.
아, 어쩌면 현지 교육 때가 가장 복작복작 즐거웠던 것 같다. 몽골에 와서 보게 되는 모든 것이 새로웠고, 또 흥미로웠으니까. 그리고 단원들과 숙소에서 매일 밤 수다파티를 벌였으니까. 그 시간 속에서 남으로 시작한 우리는 점점 가족이 되어갔다. 국내교육 때 했었던 라이프 쉐어링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깊은 라이프 쉐어링을 하기도 했고, 그러면서 퍽 자주 울기도 했다. 그 안에서 서로에 대한 친밀함이 쌓이고, 신뢰가 쌓이고, 애정이 쌓여갔다.
4월이 되어 처음 돈드고비로 내려온 첫 날, 이삿짐을 옮길 때부터 참 우여곡절이 많았다. 집을 골랐을 때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여러 하자들도 발견되었고 그러면서 참 스트레스도 많이 쌓였었다. 집에서만 우여곡절이 많은 게 아니었다. 조림지 업무 역시 모든 것이 새롭다 못해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었기에, 조심에 조심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1월부터 수많은 교육들을 받았지만, 막상 현장에서 적용하려니 모르는 게 너무나도 많았다. 그러면서 ‘감사병’도 생겼었다. 도무지 감사할 것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도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병이었다. 4월은 참 그 병으로 버텼었던 것 같다.
5월이 되면서 점차 돈드고비 생활에도, 조림지 업무에도 익숙해져 갔다. 그러면서 ‘감사병’도 점차 사라져갔다. 물론 너무 과한 감사‘병’은 좋은 게 아니지만, ‘감사’가 점점 줄어드는 것도 좋지 않은 일이었다. 조금씩 매너리즘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매너리즘은 6월에 절정을 찍었다. 4월, 5월 적응기간에는 너무나도 순식간에 지나가버리던 조림지 일상이 6월에는 정말 느리게 흐르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는 나만 느끼는 게 아니었다. 다른 단원들도 비슷하게 매너리즘을 느끼고 있었다. 흔히들 말하는, KCOC 국내교육 때도 들었던 ‘3개월 징크스’인 것 같았다. 그 매너리즘을 벗어나는 방법은, 솔직히 특별한 건 없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답답한 그 마음을 받아들이려고 했고, 그나마 내가 찾았던 방법은 ‘개발협력’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었다. 물론, 잘 되지는 않았지만 개발 관련 책을 읽으려고 노력했고, 다른 단원들과 인사이트를 나누고자 메일을 주고받았다. 또한 단체 홈페이지에 작성하는 단원 에세이를 진지하게 쓰고자 노력했다. 그러면서 하루하루 시간이 흘렀던 것 같다.
조림지 업무에서 제일 힘든 게 뭐였냐고 묻는다면 단연 관수였다. 다른 지역의 조림지들은 호스 관수도 많이 하던데, 내가 파견된 돈드고비는 ‘고비 사막’ 근처라는 지역의 특성상 물이 적어 호스 관수를 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12L 양동이 두 개를 들고 낑낑거리며 관수를 했다. 물론 주민직원분들처럼 8시간 내내 관수는 하지 못했다. 이 점이 내게는 참 고민거리였다. 나의 체력에서 8시간 풀타임 관수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외에 할 일이 없었다. 특히 여름에는 정말 관수밖에 할 일이 없던 시기라 참 난감했다. 그러면서 스스로 타협도 많이 하게 되고, 여러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스스로의 나약함을 뼈저리게 목도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매 순간 최선을 다했냐고 묻는다면 사실 그렇게는 말하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그 순간의 선택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이 때로는 자기합리화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비판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비난이 되기도 했었지만 말이다.
4월에 신규 8조림지 울타리를 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던 조림 사업은 10월 20일을 기점으로 막을 내렸다. 단원 생활의 가장 핵심사업인 조림 사업이 마무리 된다는 게 참 마음이 헛헛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뿌듯하기도 했다. 어쨌든 별 탈 없이 한 해의 사업을 잘 마무리했구나 싶어서, 2009년부터 시작된 돈드고비 조림지라는 선속에서 2017년의 점을 내가 끊지 않고 잘 이었구나 싶어서. 심한 가뭄 속에서도 잘 견뎌내 준 나무들과, 열심히 함께 조림지를 가꿔주신 주민 직원 분들에게 참 감사한 마음이다.
11월부터 지금까지 겨울 주민 자치사업으로 컴퓨터교육과 한국어 교육을 병행해 오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교육을 진행할 날들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앞으로 남은 수업 일수들이 한 손에 꼽힐 정도이기 때문이다. 이제 마지막 남은 건 유종의 미를 잘 거두는 것. 크게 욕심 부릴 것 없이, 처음 목표했던 것들만 잘 마무리하고 갈 수 있도록 해야겠다. 요즈음 뒷심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참 많이도 했었는데, 에세이를 작성하며 더 뼈저리게 느껴진다. 처음 NGO 봉사단원을 희망하고, 꿈에 부풀어 지원했던 그 당시의 마음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봐야겠다.
지난 2017년을 되돌아보면, 참 여러 가지를 얻어가기도 하고 그만큼 내려놓기도 하는 한 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장기봉사활동을 통해서 보길 원했던 국제개발협력의 민낯을 조금은 알게 되는 한 해였다. 너무 조금 알게 되어서 더 깊게 알아가고 싶은 욕망이 아직도 마음에 많이 남아있지만 말이다. 이 욕망을 계속 잘 간직하다가, 다음에 다시 한 번 더 장기봉사단에 지원해 볼 생각이다. 아, 그 때는 ‘조금 더 잘 해야지’ 라는 생각을 덜 할 것 같다.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지’라는 그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게 무엇인지 조금은 깨달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