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엄민용의 우리말이야기

vol.107-[엄민용 전문기자의 <우리말을 알아야 세상이 보인다23>] 숭늉과 오징어가 순우리말이라고?

프로필_엄민용1

“숭늉에 물 탄 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구수한 숭늉에 물을 타서 숭늉 맛이 없어져 밍밍하게 됐다는 뜻으로, 음식이 매우 싱거울 때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죠. 또 사람이 매우 싱겁거나 아무런 재미도 없이 밍밍한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기도 합니다.

구수한 맛이 일품인 ‘숭늉’은 한국을 대표하는 식문화입니다. 이 때문에 ‘숭늉’이라는 말이 우리 고유어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숭늉’은 본래 한자말입니다. 한자로 쓰던 말이 언제부터인가 글꼴이 바뀌어 고유어처럼 느껴지는 것이죠.

한자어는 바로 ‘숙랭(熟冷)’입니다. ‘익힐 숙(熟)’에 ‘찰 랭(冷)’, 즉 ‘차가운 물을 끓였다’는 의미입니다.

‘숙랭’이 ‘숭늉’으로 변하듯이 한자말의 기역(ㄱ) 받침이 이응(ㅇ)으로 바뀌면서, 한자말이 고유어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주 많습니다. “괴도라치의 잔 새끼를 여러 마리 붙여 일정한 크기의 납작한 조각을 지어 만든 포”를 ‘뱅어포’라고 하는데, 이때의 ‘뱅어’도 ‘백어(白魚)’가 변한 말입니다. 괴도라치의 새끼들을 보면 속이 훤히 보일 만큼 투명합니다. 그래서 붙은 말이 ‘백어’이고, 이것이 훗날 ‘뱅어’로 바뀐 것이죠.

또 우리나라 강과 호수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붕어’도 한자말 ‘부어’가 바뀐 것이며, “등은 잿빛을 띤 청색이고 배는 은백색이며, 온몸에 빳빳한 비늘이 있고 머리는 작은데 폭이 넓은 물고기” 숭어 역시 ‘수어’가 변한 말입니다.

여행길의 주전부리로 인기가 좋은 오징어 또한 우리 고유어가 아닙니다. 특히 오징어는 좀 섬뜩한 어원은 가진 이름인데요. 실학사상의 집대성자로 추앙받는 정약용의 친형 정약전이 지은 <자산어보>는 “‘까마귀를 잡아먹는 도적고기’라 하여 오적어(烏賊魚)라 부르며, 오적어의 뼛가루는 부스럼을 치료하는 약재로 쓰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이지만 “오징어는 까마귀를 즐겨 먹으며, 까마귀를 잡기 위해 물 위에 떠 있다가 날아가는 까마귀가 죽은 고기인 줄 알고 내려와 쪼아 먹으려 하면 되레 열 개의 다리로 까마귀를 감아서 물속으로 끌고 들어가 잡아먹는다”고 정약전은 들려줍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오징어와는 조금 동떨어진 느낌의 한자 이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오징어의 사촌쯤으로 생각되는 문어는 지금도 표기 자체가 한자말 ‘文魚’입니다. 글을 쓰는 선비처럼 먹물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글월 문(文)’ 자를 넣어 지은 이름이지요.

 한편 “옛날에 장가든 남자가 머리털을 끌어 올려 정수리 위에 틀어 감아 맨 것”을 ‘상투’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상투를 틀지 않으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어른 대접을 못 받았습니다. 이 때문에 ‘상투(를) 틀다’라는 표현은 “총각이 장가를 가서 어른이 되다”라는 의미로 쓰여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투는 우리 고유의 풍습은 아닙니다. 중국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에 가 본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중국 진나라와 초나라 사람도 상투를 틀었습니다. 그러니 ‘상투’가 우리 고유어가 아님은 당연합니다. ‘상투’는 어원적으로 한자말 ‘상두(上頭)’가 ‘샹토’ → ‘샹투’ → ‘상투’로 바뀐 것입니다.

 한편 머리와 관련해 머리카락을 빡빡 밀며 흔히 “백구 쳤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말은 없습니다. ‘배코 쳤다’가 바른 표현이지요. ‘배코’가 “상투를 앉히려고 머리털을 깎아 낸 자리”를 가리키거든요. 우리 조상들은 상투를 틀 때 먼저 정수리 부근, 다시 말해 상투를 앉힐 자리 주변의 머리털을 깔끔하게 깎았다고 합니다. 이때의 ‘배코’도 어원적으로는 백회(百會)가 음운 변천을 거쳐 굳어진 말입니다.

이 밖에 한자말 백채(白菜)가 배추로, 침채(沈菜)가 김치로, 산행(山行)이 사냥으로, 지룡(地龍)이 지렁이로 고유어처럼 바뀝니다. 또 평안북도의 벽동과 창성 지방의 소는 유난히 크고 힘이 셌으며 그 지방의 소를 벽동과 창성의 앞 글자를 따서 ‘벽창우’라 불렀는데, 그 말이 지금은 ‘벽창호’로 쓰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