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95-[유전자 에이전트 김용범의<방귀와 분뇨의 비밀 이야기④>] 방귀 뀔 자유는 있을까?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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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귀는 평등하다. 지위고하를 떠나 누구나 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방귀 뀔 자유를 누구나 가지고 있을까? 자유란 “어떤 존재가 내부나 외부로부터 구속이나 지배를 받지 않고 하고자 하는 것을 하거나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방귀를 뀔 자유는 결국 내 외부 상태에 따른 구속이 없어야 한다. 주위에 사람들이 없다고 가정하자. 이때 방귀가 나오면 그대로 뀐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방귀를 뀌더라도 우리의 의식은 방귀가 나오는지 모른다. 아마 뱃속에서 미생물 작용으로 생기는 양만큼 뀔 것이다. 적어도 이런 상황에서는 구속이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여건이 바뀌어 다른 사람과 함께 있다면 어떨까? 누구나 뀌는 방귀지만 아무 곳에서 마음 놓고 뀌는 것이 간단치 않다. 혹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농담이 뭔지 아는가? BC 1900년경에 수메르 민족이 남긴 농담이 있다. 지금부터 약 4천 년 전의 농담이다. 그 농담은 “태고부터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은 일은?” 이란 질문과 이것에 대한 “젊은 여성이 남편 곁(무릎)에서 방귀 뀌는 것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라는 답변이다.
방귀는 누구나 뀌는 것이지만 뀔 자유는 보장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웃어른과 함께 있다고 해보자. 누가 편안하게 방귀를 뀔까? 사장님 앞에서 방귀 뀔 사원이 있을까? 사업상 또는 다른 이유로 처음 만나는 사람과 같이 있다면 방귀를 뀔까? 방귀가 나오더라도 참을 것이다. 방귀를 뀌면 다른 사람들이 무례하게 생각할 가능성도 있고 냄새로 분위기를 망칠 수도 있다. 더구나 방귀는 의지력을 동원하면 참을 수 있다. 따라서 누구나 방귀를 뀌지만 늘 자유롭게 뀌는 것은 아니다. 상황과 여건이 맞아야 한다.
자유롭게 뀔 수는 없지만 이미 말한 것 같은 특정 상황에서 방귀를 자유롭게 뀐다. 그러나 언제나 혼자 있을 때 만 편하게 뀌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과 같이 있는 경우에도 방귀를 뀌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다. 거꾸로 누군가 방귀를 텄다면 그것은 매우 가깝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거꾸로 말하면 상대방이 편하지 않으면 방귀를 쉽게 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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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이택종 작가

이택종 작가는 강릉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꿈과 낭만 속에서 자랐다. 지난 25년간 만화가와 일러스트레이터로 살았다. 그 동안 여러 출판사에서 중·고등학교 교과서의 삽화 및 만화작업을 했다. 현재는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웹진 ‘e행복한 통일’에 월간 만화를 연재하고 있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대학 강사다. 대학 형편상 시간 강사에게 전용 연구실을 주지는 못한다. 대신 강의 시간까지 강사들이 준비하거나 쉴 수 있는 강사실을 제공한다. 여럿이 함께 사용한다. 나도 강의 시간까지 강사실에서 있으면서 강의 준비를 하거나 쉰다. 수업시간 때문에 기다릴 때는 늘 같은 분들을 만난다.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루 이틀 지나다 보면 인사도 하고 얼굴이 익히고 서로 말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기 생각을 포함해서 이런저런 대화를 할 때도 있다.
최근에 내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농담을 강사실에 있던 다른 강사님께 이야기했다. 그분은 여성이었는데, 여성은 공중 화장실에서조차 방귀 뀌는 것이 어렵다는 말을 하셨다. 누군가 밖에서 들을 것 같아서인지는 몰라도 방귀를 뀔 때 다른 소리를 낸다고도 했다. 여자 화장실에 들어갈 수는 없으니 내가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분 말씀을 들어보면 모르는 사람 앞에서도 방귀는 함부로 뀌지 않는 것 같다. 남자도 그렇기는 하지만 여성이 좀 더 방귀를 뀌는 것을 어려워하는 것 같다.
어쨌거나 방귀를 뀌는 관계는 편한 사람들이고, 이들은 부부, 가족 그리고 친한 친구들로 요약된다. 그런데 이들은 행복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이들과 관계가 좋을수록 더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방귀를 아무렇지 않게 뀔 수 있는 사이의 사람들과 친밀한 정도가 자신의 행복을 더 높여준다는 의미다. 방귀를 뀌는 행위가 행복을 높여준다는 것은 아니니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어쨌거나 당신은 아무렇지 않게 방귀 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주위를 한 번 돌아보면 좋지 않을까 싶다. 혹시 당신 때문에 상대방이 편하게 방귀를 뀌지 못하지는 않을까?

다시 우리가 방귀를 뀔 자유를 가지고 있을까? 란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주위 상황에 따라 방귀 뀔 자유는 오락가락한다. 그러나 방귀를 뀌는 문제는 자신의 의지로 결정할 수 있다. 사장님 앞에서 방귀 뀌지 말라고 한 사람은 없다. 뱃속에 가스가 들어찼더라도 자신이 뀌지 않겠다는 의지를 불사르면 뀌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사장님은 부하 직원 앞에서 방귀를 뀌기도 한다. 연세가 높으신 할아버지나 할머니도 아무렇지 않게 방귀 뀌기도 있다. 이런 것을 보면 방귀 뀔 자유가 완전히 제한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선택은 오직 본인 몫이다. 적어도 일상에서는 이렇다.
이런 일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주변 상황에 따라 방귀 뀔 자유가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오래전 냉장고 냉매가 세계적으로 바뀌었다. 이유는 냉매가 오존층을 줄인다는 과학적 결론 때문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물질이 우리의 삶을 심각하게 해할 수 있다면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방귀는 어떨까? 계속 자유롭게 뀌어도 될까? 먼저 방귀 성분을 따져보자. 방귀의 주성분 중 하나는 수소다. 이유는 장내 세균 때문이다.
장 내부에는 산소가 없다. 그래서 장내 미생물은 발효를 통해 에너지를 얻는다. 장내 미생물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대장균이다. 대장균은 균 중의 대장이기 때문에 대장균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아니다. 대장에 살아서 대장균이란 이름이 붙었는데 학명은 Escherichia coli다. 이 균이 사람이 먹은 밥이나 꿀을 분해한 결과 나오는 당인 포도당을 분해할 때 수소를 내보낸다. 과정을 간단히 설명하면 포도당은 해당작용을 거쳐서 피루브산으로 바뀌고, 이것이 다음 단계로 아세틸CoA와 포름산이 만들어진다. 이 포름산이 이산화탄소와 수소로 바뀐다. 그리고 이 수소는 방귀로 나온다.

수소는 어떤 가스인지 알아보자. 수소는 불을 붙이면 뻥 터져 버린다. 반응성이 매우 빨라서다. 반응 중에 산소와 결합해 물이 된다. 방귀에 수소가 들었기 때문에 방귀를 뀔 때 그 가스를 모아서 불을 붙이면 수소와 비슷하게 뻥 터져 버린다. 가스 불 앞에서 내가 방귀를 뀌면 터질까? 그렇지는 않다. 양이 적어서다. 그렇지만 70억 인구가 조금씩 뀐 방귀는 어떻게 될까? 모으면 상당량이 될 것 같다. 가축들도 방귀를 뀐다고 하니 그들도 수소를 내보낼 것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미래의 수송 수단으로 수소 자동차를 개발하고 있다. 도기 대기의 오염을 줄일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수소 자동차를 타면 운송 등의 과정에서 가스가 새어 나올 수 있다. 이들이 대기 중으로 나오면 어떻게 될까?
수소는 가벼운 기체다. 대기는 질소가 대부분이라서 수소보다 훨씬 더 무겁다. 질소 원자량은 14 정도지만 수소는 1이다. 가스는 분자상태라서 수소 원자 두 개가 결합해 무게가 2가 된다. 수소나 질소 분자가 아보가드로 수(2.02 × 1023개(1 mole)가 있으면 질량이 질소는 28 그리고 수소는 2g이 된다는 의미다. 대기는 질소 80%에 산소가 20%이다. 산소의 원자량은 질소보다 더 큰 32다. 대기의 평균 무게는 약 29 정도다. 수소보다 훨씬 무겁다. 따라서 수소 가스는 대기의 위쪽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이것은 놀이터 등에서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풍선이 위로 향하는 이유다. 물론 그 풍선은 헬륨을 쓴다. 수소를 쓰면 터질 수 있어서다. 간혹 악덕 업자가 수소 가스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안전을 위해서는 헬륨을 써야 한다. 헬륨은 수소보다는 약간 더 무거워서 1 mole은 4 g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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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 위쪽으로 올라간 수소는 어디까지 갈까? 무한정 올라가지는 못한다. 중력과 더불어 화학반응이 수소를 사라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수소가 성층권에 있는 오존층까지 가면 여기서 왕성한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성층권에 도달한 수소는 자외선을 만난다. 자외선은 오존층이 흡수하는데 오존층 밖은 자외선이 많다. 자외선을 쏘인 수소 분자는 둘로 나뉜다. 그렇게 나누어진 것을 라디칼이라고 하는데 반응성이 매우 크다. 산소도 이와 같은 반응을 통해서 라디칼을 만든다. 그리고 이 둘이 결합해서 물이 생성된다. 오존을 만드는 산소가 물을 만드는 것이다.
이런 반응이 일어나면 어찌 될까? 오촌층에서 만들어지는 산소 라디칼은 다른 산소와 반응하여 오존을 만들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자외선을 흡수한다. 그런데 산소 라디칼이 수소와 결합하게 되어 오존을 덜 만들게 된다. 결과적으로 오존층의 오존양 줄어들게 된다. 2002년 사이언스 논문에 전 세계에서 사용하는 에너지를 모두 수소 에너지로 바꾸면, 용기 등에서 새 나오는 수소 때문에 오존층이 약 8% 줄어든다고 보고했다. 오존양이 1% 줄면 자외선은 2%가 늘어나며 피부질환은 3% 그리고 피부암은 4%가 늘어난다.

그런데 방귀에 수소가 많은 비율로 있다. 이 방귀가 모여서 양이 많아지면 수소가 오존층을 줄인다. 이것은 옆 사람이 방귀를 뀌면 내가 피부암 걸릴 확률이 올라간다는 뜻이 된다. 죽을 확률이 커지는 것이다. 당신이라면 그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두겠는가? 과거에 인구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방귀 양이 충분히 적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 오존층이 줄일 만큼 많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방귀가 옆 사람에게 해를 줄 가능성은 있다. 더구나 수소 이용이 많아지면 더욱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옆 사람에게 방귀를 뀌라고 해야 할까? 말라고 해야 할까? 더구나 방귀에는 온실가스도 있다. 오존층의 오존 감소뿐만이 아니라 기후변화도 촉진할 수 있다.
방귀는 상황에 따라 뀔 자유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의 기후변화나 오존층 파괴 가능성을 생각하면 우리는 방귀를 참아야 할 것 같다.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방귀를 참았던 것처럼 친밀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방귀 참아야 한다. 아마 더 참아야 할지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뀐 방귀로 피부암에 걸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것을 생각해 보면 어떤 사람과 함께 있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우린 방귀를 뀔 자유가 없는 것 같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방귀를 참아야 한다. 잠을 잘 때도 방귀를 참아야 한다. 당신은 과연 방귀 참을 수 있을까? 웃기는 소리다. 솔직하게 방귀를 어떻게 참나? 잠자면서 나올 수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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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방귀를 참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방귀 참는 것이 건강에 좋지 않을 수 있다. 방귀 참으면 어떻게 될까? 배 속에 있던 가스들이 장내 세포로 확산을 통해 이동한다. 그리고 혈액에 용해되고 그것이 혈관을 따라 온몸을 돈다. 몸에 나쁜 가스들이 온몸을 돌아다닐 수 있다. 그런 후에 폐에서 가스 교환이 이루어지고 허파꽈리에 잠시 있게 된다. 폐 속에 있는 기체는 다시 호흡기를 통해서 밖으로 나온다. 방귀에 냄새가 없다면 다행이겠지만 냄새가 있으면 어찌 될까? 입에서 똥 냄새가 나게 될 수도 있다. 입에서 똥 냄새 풍기며 사는 것이 더 나을까?

입 냄새 때문이 아니더라도 방귀를 참을 수 없다. 일시적으로 참을 수 있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살아있는 한 그냥 뀌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사랑하는 누군가가 그것으로 인해 암에 걸려 죽거나 다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언제나 이렇다. 차를 타야 하지만 그것 때문에 대기 오염과 미세먼지에 시달린다. 누군가는 일찍 사망하거나 죽는다. 영수증을 써야 하지만 그 속에는 환경 호르몬인 비스페놀 A가 들어있다. 누군가는 그것으로 발생 과정에 이상이 생길 수 있다. 플라스틱을 사용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들이 미세한 가루가 되어 우리 목숨을 노린다. 이미 호주에서는 인분에서 미세플라스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런 것은 과거엔 없었거나 알지 못했던 위험들이다. 살기 위해서 우린 무엇인가를 해야 하지만 그것이 미래엔 우리의 우리 삶을 옥죈다. 현재 우리가 하는 것 중에는 아직 알지 못하는 위험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국립환경과학원에서는 시료를 저장해 두는 시료 은행을 운영한다. 미래에 위험이 밝혀지면 그때 분석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인간에게 돌아오는 해를 막을 수가 없다. 더구나 사람이 사용하는 물건 하나하나에서 이산화탄소나 환경 오염이 생긴다. 생존한다는 것 자체가 타인에게 해를 주는 세상이 되었다.

어쨌거나 우리는 인간 활동 결과 항상 누군가가 해를 입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해는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지 특정할 수가 없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있는데 그들을 명확히 구분할 수가 없다. 근대와는 다른 개념의 세상인 것이다. 과연 이런 세상에서 우린 어찌 살아야 할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인구를 줄이자는 제안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자고 하면 영화 킹스맨이 떠오른다. 이 영화는 환경 보전을 위해서 사람을 죽이겠다는 아이디어를 행하는 사람을 막는다는 것이 주제다.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있겠는가? 사람을 줄이는 일이 한 가지 대안이 될 수 있으나 인위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 없다. 사람 수를 줄이기 위해서 제비 뽑을 수도 없는 일이다.
아이를 적게 낳는 것을 대안으로 내세울 수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유발한다. 당장 우리가 출산율 저하로 인한 고통을 겪고 있다. 더구나 모든 나라가 여기에 동참한다는 보장은 더더욱 없다. 우리는 출산율은 1보다 약간 높지만, 아프리카는 7이 넘는 나라도 있다. 모든 나라에 동등하게 실행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기존 개념으로는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대안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런 것처럼 우리가 직면한 환경을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방귀 뀔 자유가 있을까? 적어도 지금의 자유란 개념으로 보면 없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방귀 뀌지 않고 어떻게 사람이 사는가? 소화관을 가진 인간인 이상 방귀는 앞으로도 계속 그리고 늘 뀌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방귀로 인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어떤 방법이어야 할까? 피해가 생기는 원인을 찾아서 줄여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과 이미 생긴 피해자를 구제하는 것이다. 이러한 길로 가기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패러다임의 변화. 그것은 현대가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기는 하지만 어떻게 바꿀 것인가? 를 물으면 과거와 같다. 19세기 근대의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사회가 모순이 커진 것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지구온난화나 환경문제같이 현대 사회가 직면한 문제의 해결 방안을 위한 새로운 방향을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앞으로 방귀 뀔 자유는 있는가? 란 제목으로 난 두 편의 글을 더 쓸 것이다. 거기에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고나 습관 그리고 사회가 요구하는 비판적 사고를 돌아볼 것이다. 풍요로움과 사랑이 어울리는 따뜻하고 협력과 나눔이 있는 세상을 향해 출발하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