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95-[엄민용 전문기자의 <우리말을 알아야 세상이 보인다⑪>] ‘거시기’가 사투리라고요? 아따, 모르는 소리 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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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에 대한 여러 주장 중에는 엉뚱한 ‘거짓 주장’도 많습니다. 멀쩡한 우리말을 일본어 찌꺼기라고 하는가 하면, 우리말에 분명 피동사가 있는데도 ‘수동태를 쓰면 우리말답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써 온 표준어를 사투리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필자도 간혹 쓰는 ‘그랬걸랑요’의 ‘-걸랑’도 그중 하나입니다. 필자가 ‘-걸랑’를 쓰면 “우리말 달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사투리를 왜 그리 많이 쓰냐”며 핀잔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터넷 블로그에도 ‘-걸랑’을 충청도나 서울 사투리라고 주장하는 글이 적지 않지요.
하지만 그런 얘기는 거짓말입니다. ‘-걸랑’은 당당한 표준어입니다. ‘-걸랑’은 ‘-거들랑’의 준말이지요. 그리고 ‘~거들랑’은 ‘-거든’과 ‘-을랑’이 더해진 말인데, 이때 ‘-을랑’에는 강조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거들랑’은 ‘-거든’을 강조한 말이고, 준말인 ‘-걸랑’ 역시 ‘거든’을 강조한 말입니다. 여기에 존대를 나타내는 조사 ‘-요’가 붙으면 ‘-걸랑요’가 됩니다. 따라서 ‘-했걸랑요’는 ‘-했거든요’를 강조한 말이 됩니다.
다만 ‘-걸랑요’가 표준어이기는 하나 조심해서 쓸 필요가 있습니다. ‘-걸랑요’는 두루 높인 말로, 사회적 신분이나 연령이 큰 차이가 나는 사람에게 쓰는 것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대상에게는 극존칭인 ‘-습니다’를 쓰는 것이 좋습니다.
‘-걸랑’ 외에도 우리 주변에는 멀쩡한 표준어에 사투리의 고깔을 씌우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아무 때고 쓰는 ‘거시기’가 대표적 사례이지요.
한번은 어느 방송에서 한 출연자가 ‘거시기’라는 말을 쓰니까, 다른 출연자가 “방송에서 왜 고향 사투리를 쓰느냐”고 면박을 주는 것을 봤습니다. 그런데 더 황당한 일은 ‘거시기’라는 말을 쓴 출연자가 얼른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한 편의 코미디를 보는 듯했습니다. 왜냐고요? ‘거시기’는 절대 사투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바로 말하기 곤란한 사람 또는 사물을 가리키는 대명사” “하려는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바로 말하기가 거북할 때 쓰는 군소리”가 바로 ‘거시기’입니다. 푸른아시아 독자 여러분도 그런 의미로 쓰실 겁니다.
그런데 이 말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모든 국어사전에 표준어로 올라 있습니다. 게다가 최근에 사전에 오른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 처음 국어사전이 나왔을 때부터 떳떳하고 당당한 표준어였습니다.
“아따, 시방 뭐하는 거야”의 ‘아따’와 ‘시방’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투리가 아니라는 얘기죠. “무엇이 몹시 심하거나 하여 못마땅해서 빈정거릴 때 가볍게 내는 소리” 또는 “어떤 것을 어렵지 아니하게 여기거나 하찮게 여길 때 내는 소리”로 쓰는 ‘아따’는 전라도 사투리가 아니라 멀쩡한 표준어이고, ‘시방(時方)’ 역시 ‘지금(只今)’과 같은 의미의 한자말이자 바른말입니다.
또 “골목에서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와 식겁했다”의 ‘식겁(食怯)’도 예전부터 국어사전에 “뜻밖에 놀라 겁을 먹다”는 뜻으로 올라 있던 표준어입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조지다’도 자주 사투리로 오해받는 말입니다. “화를 참지 못하는 바람에 신세를 조졌다”의‘조지다’ 역시 표준어입니다.
이처럼 멀쩡한 표준어들이 사투리 누명을 쓰고 홀대받는 일이 더는 없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