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94-[유전자 에이전트 김용범의<방귀와 분뇨의 비밀 이야기③>] 방귀, 여성과 남성 중 누가 더 구릴까?
별로 반기지 않는 방귀지만 재미있는 이야기의 단골 소재다. 설화나 동화도 많다. 그 중엔 방귀 한 방에 돌절구가 날아가거나 집이 기울어진 이야기도 있다. 실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누가 믿겠는가마는 재미있는 소재임엔 틀림없다. 다른 것도 있다.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이 방귀 사건이다. 그가 방귀를 뀌니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했다는 일화다. 이 한마디를 했던 그는 아부의 대명사가 되었다.
방귀는 나이와 영역 그리고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 추정컨대 어린이, 여성과 남성,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누구나 뀐다. 직위도 구별하지 않는다. 대통령, 장관, 재벌도 뀐다. 정신이나 육체의 장애와 상관없이 누구나 뀐다. 즉, 사회적 지위의 높낮이나 성별 그리고 장애 유무와 상관없이 모두 뀐다. 한 마디로 평등하다. 아마 이것처럼 평등한 것을 찾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일까? 공감도 쉽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기 때문에 재미있는 이야기나 설화의 소재가 된 이유라 생각해 본다.
평등한 방귀. 그래서 인간이 평등한가? ‘풋~~’ 좀 웃기다. 누구나 방귀를 평등하게 뀌니 냄새도 같을까? 평등하게 뀐다는 것이 방귀 가스 구성성분이 똑같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방귀 냄새는 사람의 내장에서 사는 미생물, 유전적 특성 그리고 먹은 음식에 따라 달라진다. 섬유소가 많은 음식, 젖산 과민증 같은 증상 등이 있는 경우 양이 늘거나 냄새가 고약해진다. 항생제를 먹어서 대장 내 미생물 군총에 변화가 생길 경우도 고약한 냄새가 날 수 있다. 방귀 가스의 성분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사람이 그것을 항문으로 내 품는 행위는 똑같이 한다. 사람이 서로 다르지만 평등하다는 것과 통하는 것 같다.
방귀 가스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소들이 다 비슷하다고 가정하자. 이런 조건을 만들기는 쉽지 않겠지만 이론적으로 가정해보자는 것이다. 이런 상태라면 아마도 방귀 냄새는 서로 비슷할 것 같다. 이렇다고 할 때 여성과 남성 중 누가 더 구릴까? 둘이 냄새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웃기는 놈이라고 할 것 같지만 이 질문을 몇 년 전부터 학생들에게 했다. 당신은 누가 더 구리다고 생각하는가? 생각해 본 적은 있을까? 아마 대부분 없을 것 같긴 하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것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만큼이나 인간에 대해 아는 것에 관심 없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나는 방귀를 빌려 신경학, 심리학 또는 뇌과학이 알려주는 인간에 대해서 말하곤 한다.
방귀 냄새는 먹은 음식 종류, 그리고 장내 환경 등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질문할 때는 이런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냥 여성과 남성 방귀 중에서 누가 더 구린지를 묻는다. 이 질문은 정말 멍청한 질문이다. 냄새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나 변수가 너무 많아서다. 이성적이며 정답에 가까운 답은 ‘냄새에 영향을 주는 변수가 많아 그 변수를 통일하지 않으면 성별에 따라 구린 정도를 알 수 없다’이다. 그러나 이렇게 대답하는 학생은 거의 없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이 질문이 멍청한 것인지 아닌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학생들은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자기 선택을 말한다. 시간강사지만 교수라고 불리는 자가 물었으니 학생들이 답을 하는 것 같다. 그들이 왜 하냐고? 안 하면 점수를 받지 못하거나 찍힐까 봐 대답할 가능성도 있다. 설마 그들이 교수자를 사랑해서 답을 하겠는가? 그러나 학생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하는 질문임을 그들이 알까?
어쨌거나 이런 멍청한 질문에 대한 현명한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여학생은 여자가 남학생은 남자가 더 구리다고 하다. 전부는 아니지만 이런 비율이 항상 50%를 넘고 때론 70%에서 80%에 육박한다. ‘엥? 이거 답이 뭐 이래?’ 할 것 같다. 방귀 더 구린 것이 뭐 좋은 것이라고? 여자는 여자가 또 남자는 남자가 더 구리다고 할까? 그렇지만 늘 이런 답을 학생들에게서 듣는다. 이런 답을 들은 후 이유를 물어보면 아무도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모르는 것 같다. ‘여자라서 또는 남자라서 자기 성을 말했구나?’라고 물으면 웃음이 답으로 온다.
인간이 이성적 존재다. 우리는 이렇게 굳게 믿는다. 그렇다면 이성이 작동해서 합리적으로 답을 했을까? 그렇다면 당연히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누가 구린지 이유는 말하지 못하더라도 특정 대상을 선택한다. 이유 없는 선택을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뇌의 이성적 분석 능력은 있지만, 본능의 영역이 일부 망가진 사람의 삶을 연구한 보고가 있었다. 그는 여러 현상을 분석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정은 망설였다. 결정 장애를 겪은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것도 선택하지 못했고, 결국 사고 전 나름의 삶이 몰락했다. 이것은 인간이 이유를 모르는 선택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일까? 누가 더 구린지를 물으면 학생들은 이유를 몰라도 선택은 한다. 여성의 배우자 선택도 실제로는 이런 경우가 많다.
이성적 판단을 하려면 분석해야 한다. 합리적 이유를 찾아야 한다. 분석과정이 좀 복잡하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더구나 분석하려면 관련 지식이 있어야 한다. 한 분야만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지식이 필요하다. 한 마디로 지식 융합되어야 한다. 이런 과정 때문에 문제의 해답을 즉각 내놓을 수가 없다. 자료와 지식 축적을 위한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써야 한다. 사람이 이런 일을 할까? 인간 유전자에 담긴 본능은 에너지 쓰는 것을 싫어한다. 인간은 수백만 년의 수렵 채집사회에서 살았다. 이때는 먹거리를 충분히 조달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고, 에너지를 많이 쓰면 죽을 수도 있었다. 따라서 사람은 에너지를 많이 쓰는 이성의 작용보다 본능에 따른 선택을 많이 하도록 진화했다. 더구나 인간의 뇌는 몸 전체의 2%도 안 되지만, 20%에 달하는 에너지를 사용한다. 조금이라도 생각을 많이 하면 어찌 될까? 따라서 사람은 일반적으론 뇌의 이성적 판단을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이성적 판단을 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똑같은 커피를 두 개의 다른 잔에 나누어 따르고 하나는 3천 원 다른 하나는 6천 원이라는 가격표를 붙였다고 하자. 사람들에게 각각을 마셔보고 어느 것이 더 맛있는지를 물으면 어떤 대답을 할까? 똑같은 커피니 똑같은 맛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렇게 답하지 않는다. 비싼 커피를 더 맛있다고 한다. 미각 정보와 시각 정보가 달라서 생기는 현상이다. 더 나아가 비싼 커피가 더 맛있는 이유까지 설명한다. 그리고 이유를 설명할 때는 뇌의 이성 영역을 사용한다. 이성을 자신의 결정을 합리화하는데 이용하는 것이다. 이성이 자기 보호용으로 쓰인다는 뜻도 된다. 그래서인지 직관적 결정보다 오랫동안 숙고한 결정이 더 이기적이다. 어쨌거나 인간의 이성이 결코 절대적인 그 무엇이 아니다. 어찌 보면 생존을 잘하려는 뇌의 또 다른 기능에 불과하며, 유전자에서 출발한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생존을 위한 기계가 된다. 사람을 생존 기계라는 사실에 대해서 내 친구 중 한 명은 자신의 가치가 많이 떨어지고, 살아가는 의미도 사라지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사람이 대부분 본능대로 산다는 사실을 싫어하는 것 같다.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모습들을 종종 본다. 이것을 수용하면 그 너머 어떤 것을 상상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과학자다. 인간이 생존 기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본다. 그런데 인간이 생존 기계라는 사실을 수용하고, 그것에 대해 더 알면 알수록 그리고 그 지식을 행동으로 옮길수록 사람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생존 기계로 인간을 받아들이면 특별히 잘난 놈도 못난 놈도 없다. 모두가 다 부족하다. 동시에 모두가 장점이 있다. 부족한 것을 고칠 방법은 마땅치 않다. 유전자가 없거나 고장 났거나 뇌의 신경세포 연결이 잘못되었거나 등의 이유 때문이다. 이것을 수선한다는 것은 간단치 않다. 그러다 보니 나는 어떻게 하면 상대의 장점을 잘 살릴까를 고민한다. 결국 사람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애착도 커진 것 같다. 나와 다른 의견일 때도 차차 분노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람을 보려고 노력하게 더 되었다. 상대를 더 관찰하려고도 한다. 그렇게 하다 보니 삶을 더 따뜻하게 만들며 서로 더 사랑하며 살려고 하는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
이제부터 인간 이성을 이용해 여성과 남성 중 누구 방귀가 더 구릴까의 답을 구해 보자. 방귀 누가 구린지 알고 싶을까? 그것을 모른다고 죽을 것 같은가? 그럴 리가 없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정보는 널려 있지만 대부분 이런 내용은 모른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것을 생각할까? 나처럼 엉뚱하고 유별나며 뭔가가 궁금한 사람은 이런 것을 분석한다. 자신의 재미를 충족하기 위해서다. 나만의 재미를 충족한 결과는 ‘여성 방귀가 더 구릴 가능성이 크다’였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먼저 비슷한 종류와 양의 음식을 먹고, 여러 가지 다른 요소에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가정하자. 이때 여성과 남성 둘 사이 두드러진 차이가 하나 생긴다. 인간이 이성적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몸속 호르몬이다.
남성은 일반적으로 한 달 내내 호르몬에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여성은 생리 때문에 한 달을 주기로 호르몬이 바뀐다. 배란 이후에는 프로게스테론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된다. 그런데 이것은 장운동을 느리게 한다. 변비 생길 가능성을 올린다. 여성은 남성보다 변비에 걸릴 확률이 4배나 높다고 한다. 여대생의 20%는 변비라고도 한다.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본능적 생리현상이다. 따라서 평균적으로 여성은 똥 배출을 남성보다 잘못한다. 당연히 여성의 대장에 있는 똥이 오래 묵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방귀 냄새는 어떨까? 오래도록 숙성되었으니 더 구린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실제로 변비는 방귀 냄새를 구리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다. 그래서 그런가? 경험적으로 내 아들보다 딸 방귀가 더 구린 것 같기도 하다.
무더운 여름을 보낸 후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는 맑은 가을 어느 날. 여성 방귀가 남성보다 더 구리다는 말이나 하니 참 어이없다고 할 것 같다.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진짜 인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지 돌아보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우리가 믿고 있는 인간 그리고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인간의 본능과 이성에 대한 지식은 옳은 것일까? 우리가 방귀를 싫어하듯이 원하지 않는 것을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또는 생존 기계가 갈급한 생존을 위해서 꾸며낸 인간 또는 스스로 훌륭하게 포장한 잘못된 인간을 진짜 인간이라고 믿는 것은 아닐까? 천동설처럼 말이다.
왜 진짜 인간을 알아야 할까? 그것은 갈등이 커지기 때문이다. 언젠가 연인이 데이트 중 술집에 들어가서 싸워 경찰서에 갔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둘이 싸운 이유가 남자친구가 종업원을 자꾸 쳐다보았기 때문이란다. 이런 기사를 보고 있노라면 인간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알았으면 싶다. 특히 요즈음처럼 양성 간 갈등이 클 때는 더 그렇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여성의 목소리는 올리고 남성은 오히려 그런 대화를 피한다. 진정이 담긴 토론의 목소리를 듣기 어렵다. 어쨌거나 양성 간 갈등의 기초가 되는 것이 무엇일까? 한정된 자원에 대한 경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런 경쟁에 있어서 양성이 같다고 생각하는 등 인간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객관적으로 양성은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다.
나는 여성과 남성 중 누구 방귀가 더 구린지 찾으면서 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게는 좋은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내 딸이 고등학교 다닐 때였다. 일주일 내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지 못했다. 주중에는 학교와 집도 마찬가지다. 주말에 일주일 만에 집에서 대변을 눈다. 중학교 때는 때때로 화장실 변기를 막기도 했다. 변의 양이 많아서다. 변기 막으면 누가 뚫어야 하겠나? 귀찮지만 내 일이 된다. 그런데 당시에 난 딸아이가 변기를 자주 막거나 일주일간 화장실을 가지 못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변기를 뚫으며 ‘으이구’ 할 뿐이었고, ‘왜 화장실을 못 가니?’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호르몬에 의한 변비 현상을 알고 나니 거꾸로 내 딸이 측은했다. 그리고 오히려 더 사랑스러워졌다. 상대가 다를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다만 딸은 방귀 내용의 글을 보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딸을 비밀을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혹시라도 이것을 읽은 사람은 딸에게 절대 비밀로 해주면 좋겠다. 내 딸이 자기에게 있었던 일 썼다고 화낼 것 같아서다. 또한, 화내는 딸에게 엉덩이 걷어차이면 정말 아프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남들이 어떻게 하든 나는 가능하면 딸이 이 글을 못 읽게 해야겠다.
그림. 이택종 작가
이택종 작가는 강릉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꿈과 낭만 속에서 자랐다. 지난 25년간 만화가와 일러스트레이터로 살았다. 그 동안 여러 출판사에서 중·고등학교 교과서의 삽화 및 만화작업을 했다. 현재는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웹진 ‘e행복한 통일’에 월간 만화를 연재하고 있다. |
프로게스테론, 성과 관련된 다른 호르몬들 그리고 인간의 본능. 여성과 남성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점이 있음을 보여준다. 둘이 평등하게 방귀를 뀌지만 다른 냄새를 가지는 것과 같다. 평등 속의 다양성이라고 할까? 이런 다른 점은 더 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남성은 자아가 강해지고 독선적으로 변한다. 그 결과 잘 싸운다. 그러나 여성은 같은 상황에서 더 공감을 잘하게 된다. 거꾸로 그들은 싸움이 줄어든다. 이런 행동 변화는 스트레스 상황에서 옥시토신이 여성에게 더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양성이 서로 다른 행동을 뒤에도 몇 가지 이야기하겠지만 이런 사례는 엄청나게 많다. 같은 상황에서 보이는 다른 행동들. 이럴 때 우린 어찌해야 할까? 다른 행동을 보임에도 사람을 같게 만들어야 할까? 아니면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해야 할까? 생물학적으로 다른 특성을 가진 사람들을 같게 만들기는 어렵다. 불가능하다고 본다. 따라서 상대에 대한 인정과 수용이 유일한 길이지만 우린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기를 바라는 이유이기도 하다.
양성의 차이는 더 있다. 뜬금없겠지만 옷장에서 옷을 찾는다고 하자. 나는 매번 원하는 것을 못 찾고 나중에 ‘??엄마’를 부른다. ‘??엄마’는 내가 부인을 부르는 호칭이다. 부엌에서 일하던 ‘??엄마’는 옷장에 있으니 찾으라고 내게 소리친다. 그러면 나름대로 한 번 더 열심히 찾지만 난 매번 실패한다. 그리고 다시 ‘??엄마’를 부른다. 이런 것이 반복되다 보니 집사람이 ‘자신이 가서 찾으면 죽인다’며 소리친다. 금방 찾을 수 있는데 못 찾고 헤매는 내가 미운 것이다. 찾지 않고 부른다고 생각할 것 같다. 그렇지만 고맙게도 늘 와서 내가 찾던 옷을 찾아준다. 그런데 집사람이 오면 거의 1초도 걸리지 않고 찾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내가 부를 때 집사람이 더 짜증을 내는 것이 맞다. 그런데 집사람이 찾아준 옷은 내가 10분 또는 20분 이상 찾았던 옷이다. 어째 이런 일이 벌어질까? 난 그저 밥통과 거짓말쟁이가 되고 집사람에게 야단을 실컷 얻어먹는다.
이런 경험은 결혼한 중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경험인 것 같다. 특강을 할 때 이야기해 보면 주로 여성들이 이 말에 동감한다. 남자들이 찾지 않고 부인을 부르거나 게을러서 안 찾는 것은 아니다. 남자와 여자가 보는 것이 다르다. 인간이 보는 것은 뇌가 외부 환경을 해석한 것인데 이것도 양성 간 다르다. 밖에 있는 사물은 똑같더라도 시각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가공하는 뇌는 보는 것은 다르다. 여성이었던 사람이 남성으로 성전환할 경우 여성일 때 보던 것을 보지 못한다. 이것을 성전환한 그는 불편하다고 했다. 같은 뇌지만 기능을 달리하는 것으로 보아 이런 현상은 호르몬 때문에 생기는 것 같다.
다른 원인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부인이 옷을 정리해 주는 경우다. 언젠가부터 내가 직접 정리를 하게 되었다. 그 후 옷을 둔 위치를 나도 잘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둔 곳은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는 여전히 집사람이 훨씬 잘 찾는다. 이것을 볼 때 남성도 훈련을 시킬 필요는 있는 것 같다. 집에서 사용하는 다른 물건도 항상 두던 자리에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면 남성은 쉽게 그것을 찾을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나는 집 안에서 해야 하는 여성의 일이나 부담이 줄어들 것 같다. 동시에 갈등을 줄일 수 있다. 이것이 서로 상대를 더 배려하는 것 같다.
어쨌거나 여성이 평균적으로 암기 능력이 더 좋고, 말과 관련된 유전자 FOXP2 유전자 발현이 높다. 남성과 여성의 쇼핑 패턴이 다르다. 남성은 목적한 것만을 구입하지만 여성은 쇼핑몰을 다 돌아본다. 원시시대 사냥 습관과 채집 습관이 여전히 몸에 남아있다. 뭔가를 생각할 때 여성은 좌뇌와 우뇌 양쪽 뇌의 교류가 활발하다. 그러나 남성은 좌뇌와 우뇌가 각각 앞뒤 교류가 많다. 좌뇌와 우뇌 사이의 교류는 적다. 아마도 이러한 차이가 행동의 차이를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남성의 성 충동은 시각 자극을 통해 주로 발생하지만, 여성은 촉각이 중요하다. 본능 때문이다.
여성에게 건강상 물을 많이 먹으라는 처치를 내렸던 의사에게서 여성이 남성보다 물을 적게 마시는 경향이 있음도 알았다. 건강을 위해서는 노폐물 배출을 위해서 물을 적당히 많이 먹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빈번한 오줌이 불편해서가 이유라고 한다. 그런데 자주 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안심하고 오줌을 누기도 어렵다. 꼭 이렇게 해야 할까? 싶다. 여름에도 창문을 열지 못한다는 여학생의 말도 들었었다. 안심할 수 없어서다. 어쨌거나 난 과거에 난 여성이 이렇게 행동한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여자도 남자도 둘이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둘이 비슷하다는 전제하면 ‘상대가 왜 나처럼 행동하지 않을까?’를 고민한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행동을 바꾸라고 잔소리한다. 사회적으론 형벌을 가하기도 한다. 그러면 달라질까? 그렇지 않다. 좋지 않은 갈등이 반복된다. 시간이 갈수록 갈등은 오히려 더 늘어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찌 해결해야 할까? 이 해법에 난 인간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상대가 나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여성이 남성의 행동을 알고 반대로 남성은 여성의 행동을 알게 된다.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이해한 바로는 양성은 서로 다른 점이 있으며, 경쟁보다는 보완이 필요한 관계라 생각된다. 서로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관계란 뜻이다. 양성을 이런 관계로 이해할 때 갈등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이성에 호소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항상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또 그렇게 한다고 철석같이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컵을 집으려고 생각하면 컵을 집고, 펜을 잡고자 판단하면 그렇게 한다. 그러니 자신의 의지와 생각대로 행동한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하도록 명령하는 뇌의 부위가 어디에 있는가? 또 뇌가 언제 그런 명령을 내리는가를 분석해 보면 이런 믿음이 달라진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컵을 잡고 또 펜을 잡는 근육을 움직이는 뇌 부위가 인간이 그렇게 하려는 생각보다 먼저 활성화된다. 행동이 먼저이고 생각이 나중이란 의미다.
이것뿐이 아니다. 잘못에 대한 응징도 이성적 작용일 것 같지만 본능이다. 여성이 남성에게 느끼는 호감도 냄새로 들어온 신호에서 출발하는 본능이다. 용서도 그렇다. 더 나아가 정치인에 대한 선호도조차 본능에 속한다. 이런 것들은 현대 생물학, 뇌과학, 심리학 등의 학문에서 나오는 결과들이다. 본능은 많은 부분에서 이성보다 훨씬 강력하며 인간 행동을 결정한다. 이런 결과로부터 이성은 본능의 지배를 받는 존재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 이런 것은 어떤 사람은 시각적 자극 때문에 생기는 성 충동을 제어할 수 없을 수 있다는 뜻이다. 본능에 비추어 보면 성과 관련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양자 모두 책임이 있는 것 같다.
어쨌거나 이성에 호소하고 상대의 행동을 바꾸려는 방식으로 갈등을 해결할 확률이 떨어진다. 지금까지 경험을 보면 반복되었다. 더구나 과학이 분석한 인간의 모습을 볼 때 나는 거의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려면 나는 인간에 대해 과학적 분석 결과를 수용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하면 상대를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잔소리나 형벌, 교육 같은 것보다는 행동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유인책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여성과 남성의 방귀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통해서 사람을 다시 돌아보았으면 좋겠다. 인간은 모두 똑같을까? 그렇지 않다. 개개인의 유전자는 각각 모두 다르다. 성격도 다르고 같은 사건에 대한 반응도 다르다. 같은 질문에 대한 답변도 다르다. 타고난 유전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고, 세대나 경제 수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양성 사이도 다르다. 이렇게 다른 그들을 한 가지 기준으로 평가하고 재단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추구하는 것이 있다. 생존 가능성 향상이다. 이것을 수용하면 혹자는 삶의 의미를 떨어뜨린다는 생존 기계가 된다. 그러나 내 경우는 달랐다. 이 개념을 수용하니 사람들이 오히려 더 사랑스러워졌다, 각각의 유전자와 자란 환경이 서로 다르니 다름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필요함도 느꼈다. 솔직하게 내가(사람이) 아니면 누가 있어 모자람과 부족함이 있고, 어찌 보면 하찮은 생존 기계를 사랑해주겠는가?
방귀 냄새 누가 구릴까? 정말 무가치한 질문 같지만, 그것을 꼼꼼히 따지면 그렇지만은 않다. 먼저 누구 방귀 구린지를 알아가면서 난 즐거웠다. 딸 즉, 여성이 가진 일반적인 고통을 알았다. 동시에 나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 다른 사람과 다른 것임을 확인했다. 딸은 방귀 이야기가 싫어 보지도 않는데, 나는 거꾸로 재미있다. 이와 비슷한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벌어질 수 있다. 다른 어떤 황당한 질문을 알아가면서 어떤 누군가가 즐거울 수 있다. 그런데 우린 나와 다른 즐거움을 찾는 사람을 받아들이고 있나? 혹시 이상하다고 그를 멀리하지는 않을까? 다름을 받아들이려면 경쟁이 아니라 사랑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이 그럴 때다.
방귀를 알아가며 나는 딸의 고통을 이해했다. 남들이 좋아하지 않는 똥이나 방귀를 통해서다. 방귀나 똥을 뀌며 싸는 존재라고 하면 우리의 가치는 떨어지지 않을까? 살아갈 이유는 찾을 수 있을까? 어려울 것 같다. 이것 때문에 우린 방귀나 똥을 싸는 인간이란 것을 애써 지우려는 것은 아닐까?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인간이 생존 기계란 사실을 알면 사람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마음과 비슷한 것 같다. 이런 상태라면 진짜 인간의 모습을 보지 않고 회피하게 될 것 같다. 그러면 과거의 굴레를 반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따라서 나는 점점 더 정말 인간을 제대로 돌아봐야 할 것 같다. 과학이 알려주는 인간의 모습을 수용하면, 갈등과 고통 해결을 위해 다른 차원으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들이 누비던 시대에 아무 곳에서나 똥 싸고 오줌싸며 자위까지 했던 디오게네스도 있었다. 그들 모두가 인간이었다. 고상한 면만이 인간의 모습이 아님을 디오게네스는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똥 싸고 방귀 뀌는 생존 기계에 불과한 인간이란 사실을 받아들이니 난 더 좋은 것 같다. 비록 완벽한 이성적인 인간의 모습을 잃어버린 아쉬움은 있지만,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며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부, 가족,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깊은 친구 그리고 뜻이 같은 사람들을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행복의 시작 아닌가? 따라서 양성 간의 갈등이 커지는 요즈음, 양성 간 다름을 서로 이해하고 수용하며, 상대방을 좀 더 사랑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할 때 삶이 더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여성과 남성은 근육량이 다르다. 근육이 많은 남성은 에너지를 많이 사용해 열이 많이 난다. 여성은 그 반대다. 그래서 여성은 여름철 에어컨 바람을 남성보다 더 춥게 느낀다. 지하철을 탔다고 하자. 추위를 느낀 여성이 기관실에 전화를 건다. 열차 안이 추우니 온도를 높여달라는 거다. 기관사는 알았다며 온도를 올린다. 잠시 후 열이 많이 생기는 남성이 더위를 빨리 느낀다. 그리고 전화를 한다. 그는 온도를 낮추어 달라고 한다. 기관사는 고객의 요구에 따라 온도를 낮춘다. 그러면 잠시 후 여성이 다시 전화한다. 온도를 올려달라는 요구다. 기관사는 다시 온도를 올린다. 그러면 잠시 후 남성이 전화한다. 온도를 낮추어 달라고. 그렇게 춥다고 또 덥다고 서로 전화를 반복해서 건다. 기관사는 양쪽 전화를 받느라 죽을 맛이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서로가 힘들게 만들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자신만을 생각하고, 다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생기는 일이다. 따라서 자신의 옆 사람을 좀 더 객관적으로 이해하려 해보자. 그러려면 상대의 느낌이나 생각을 물어 상호 간의 공감을 늘릴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