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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93-[유전자 에이전트 김용범의<방귀와 분뇨의 비밀 이야기②>] 방귀, 아들을 몰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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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내가 방귀로 온실가스를 많이 내보내서 그런가? 금년 여름 정말 덥다. 더워도 더워도 평생 이렇게 더운 여름을 보냈었던 기억이 없다. 기상관측 111년 만에 최악의 더위라고 하니 내가 이렇게 느끼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더구나 미래엔 온난화로 여름이 더 길어진다고 한다. 그러면 앞으로 더위가 더 올 것 아닌가? 걱정이다. 옆에서 아무런 말 없이 힘겹게 돌고 있는 선풍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다.
무더위에 지쳐있던 이번 여름. 사소한 움직임도 거부하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왼쪽 팔을 괴고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다. 내가 TV를 보고 있어서일까? 아들이 다가와 오른쪽 옆에 앉았다. 간단한 몇 마디를 주고받으며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갑자기 ‘빠방빠방 빠바바방’ 하며 엉덩이에서 기관총 소리를 낸다. 방귀가 터져 나온 것이다. ‘집에서인데 뭐 어때!’ 사실 그렇지 않은가? 집에서는 통상 거리낌 없이 방귀를 뀌는 경우가 많다.

방귀의 속도는 대략 초당 3m 정도이다. 시속으로 11km가 넘는다. 이 속도는 걷는 속도의 약 3배다. 이런 속도로 나오니 방귀 가스는 바지 천의 섬유 사이를 비집고 나올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앉아있던 자세로 볼 때 방귀는 아들에게 향했다. 아마 방귀 소리로만 생각하면 그것의 평균 속도보다 더 빨랐을 것 같다. 그래서일까? 방귀를 뀌자마자 바로 아들이 ‘어휴, 냄새!’라고 불평하며 일어섰다. 그리고 곧바로 자기 방으로 갔다. 방귀 한 방으로 아들을 거실에서 몰아낸 것이다.

아들은 왜 방귀 냄새를 피했을까? 방귀 냄새는 똥 냄새와 비슷하다. 본인은 뇌가 어떤 작용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뇌는 똥처럼 지저분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딸은 방귀 소리만 들어도 진저리를 친다. 만일 주변에 똥이 온통 널려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인간이 이런 곳에서 살 수 있을까? 당연히 어렵다. 더구나 그것이 썩지 않는다면? 상상하기조차 싫다. 그래서 아들은 방귀 냄새를 본능적으로 피했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방귀를 온실가스라고 가정해 본다면 어떨까? 지구 전체가 똥 냄새나는 곳이 된다. 사람들이 과연 그런 곳에서 살 수 있을까?

이번 여름 더위를 견디려면 다른 때보다 더 많이 에어컨을 켜야 했을 것이다. 에어컨 바람은 온도와 습도가 모두 낮아 쾌적감을 준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거실 소파에 앉아서 책 읽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밖은 나무들이 무더위에 축축 늘어져 있지만 우린 시원한 실내에서 즐겁게 여름을 보낼 수 있다. 이것도 나름 낭만적이지 않은가?

에어컨을 틀고 시원한 거실 속에서 지내는 이 방법은 거실에서 비스듬히 앉아 방귀를 시원하게 한 방 날리는 것과 비슷하다. 에어컨을 틀면 틀수록 더 많은 이산화탄소가 나온다. 덩달아 아황산가스나 질소산화물 같은 대기오염물질도 발생한다. 전기를 만들기 위해 화석 연료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오염물질은 대기 중에서 화학반응을 일으켜 오존과 초미세먼지를 만든다. 최근엔 관심이 낮아졌지만, 초미세먼지는 지난겨울 중대한 문제를 일으켰던 오염물질이다. 이것은 암을 일으킬 수 있는 물질로 당연히 여름에도 있다. 그런데 전기를 많이 사용하면 이것들의 대기 중 양은 늘어난다. 미래에 온난화가 심해지고 건강이 나빠질 가능성이 커진다. 따라서 내가 거실에서 아들에게 방귀를 한 방 먹인 것으로 비유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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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서 아버지에게 방귀를 한 방 얻어맞은 자식은 불평이라도 한다. 그러나 만일 내가 가르치는 학생이 그런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방귀 뀌었다고 내게 불평할까? 솔직히 이렇게 방귀를 날린 적은 없어서 잘 모르지만 나름 추정할 수 있다. 오래전에 내가 생태 조사 때문에 설악산 대청봉에 오른 적이 있다. 조사 대상은 잣나무였다. 나보나 나이 많았던 연구관 한 명, 20대의 젊은 대학원생 그리고 나였다. 출발 전에 뭔가를 잘못 먹었는지 둘이 산에 오르며 같이 방귀를 뀌어 댔었다. ‘부륵 부르륵 북북 부르르르’. 오래돼서 기억이 가물대지만 얼마간 이랬다. 시간이 지나니 듣기 거북했는지 젊은 대학원생이 한마디 했다. ‘중년의 아저씨들이 방귀 뀌는 것을 이해한다’고. 이런 정도다. 이런 경험으로 보면 아마 학생들은 내가 방귀를 뀌어도 아무런 말도 못 할 것 같다. 초대 대통령이 뀐 방귀에 대해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왜 아들같이 하지 못할까? 약자가 투덜댈 때 돌아오는 불이익을 줄이려고 하려는 행동이라 생각된다. 힘이 없으면 자신의 정당한 권리도 가져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번 여름 누진세 폐지 요구도 약자가 가진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다. 111년 만의 무더위였다. 누구라도 적은 비용으로 시원하게 살고 싶을 것이다. 누진세를 폐지하자는 요구가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경제·사회적 약자들은 같은 시기를 어떻게 보냈을까? 분명 그들도 똑같이 더웠을 텐데, 이번 더위를 시원하게 보낼 방법을 요구했었던가? 그들은 에어컨을 매입할 능력이 없었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누진세 폐지 요구가 그들에겐 다른 나라 이야기였을 것이다. 누진세 폐지 요구하는 사람들도 약자를 배려해주지 못했다. 이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가 약자를 배려하는 것이 의외로 어렵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누구나 자신의 어려움 해결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이미 말한 것처럼 평상시보다 더 많이 사용한 에어컨용 전기는 앞으로 더 더운 여름과 더 많은 대기오염을 부른다. 결과적으로 약자들은 장차 더 길고 더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된다. 경제·사회적 약자가 무더운 여름에만 더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온난화는 여름을 더 덥게 할 뿐마 아니라 겨울도 더 춥게 한다. 그런데 약자들은 재정이 좋지 않아 추운 날 충분한 난방을 못 한다. 더구나 겨울에 초미세먼지 농도가 더 높다. 그들에겐 더 큰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 난방도 어려운데 공기청정기 살 여유가 있겠는가? 고통이 크다. 그렇다고 그들이 온실가스나 오염물질을 다른 사람보다 더 배출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소비 수준이 낮아 평범하거나 상위 계층 사람들 보다 덜 배출한다. 온난화는 덜 배출하는 사람이 더 큰 피해를 받는 구조를 만든다. 이런 사회가 공정하다 할 수 있을까?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따라서 나는 앞으로 우리의 자식과 사회·경제적 약자가 포함된 온난화 대책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대책은 아마도 온난화 감소와 적응에 있어 계층 간 그리고 세대 간 형평성이 유지될 수 있는 정책이나 사회 구조 변화일 것이다. 우리가 이런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을 한다면 다가올 미래에 자식과 약자에게 불행을 미리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혼자 있을 때 에어컨 켜는 것이 선뜻 내키지 않았다.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 때가 있어서 전기 사용을 가능한 줄이려 했다. 에어컨을 켜게 되면 전등을 최대한 꺼서, 다른 전기 사용을 최소화하려 했다. 그러다 보니 간이 냉풍기에 생각이 미쳤다. 냉풍기 원리를 이용해 간단히 집에 있던 선풍기 뒤에 의자를 놓고 아이스팩을 올려놓았다. 다행히 더 시원한 바람을 얻을 수 있다. 김치 주문할 때 따라온 아이스팩은 자원 재이용이다. 그것을 얼린다고 전기 사용이 많이 늘지 않는다. 따라서 이산화탄소 배출이 에어컨보다는 덜 늘었을 것이며, 다른 오염물질도 적게 배출했음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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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팩을 활용하면 열대야일 때 좀 더 시원하게 잘 수 있다. 먼저 문을 다 닫고 자기 전에 에어컨을 켜서 적정 실내 온도를 맞춘다. 그리고 선풍기 뒤에 아이스팩을 여러 개 둔 후 에어컨을 끄고 잔다. 이때 창문 등을 다시 열 필요는 없다. 아이스팩 덕분에 방 온도가 잘 올라가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스팩의 수가 많으면 오랫동안 방이 시원하다. 그러나 이 방법도 직접 해보니 에어컨 켜는 것보다 좀 불편했다.

이렇게 해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막을 이유는 없다. 이 방법은 전기사용량을 분명히 줄여준다. 그러나 내 경험으론 전기 아끼는 것보다 에어컨 없이 더위를 보내는 사람들에 대한 마음속 미안함을 해소하는 것에 좋다. 은근히 기분도 좋아지고, 행복감도 느껴진다. 그러나 이 방법을 다른 사람이 하도록 강제할 마음은 없다. 다소 불편하고 실천하기 번거롭기 때문이다.

불편하고 번거롭더라도 이산화탄소 배출을 감소시킬 수 있으면 해야 한다. 누군가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이런 식의 대책들이 많았고 그렇게 사람을 교육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인간이 가진 본능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인간의 몸은 에너지를 덜 쓰도록 수백만 년 동안 진화했다. 원시시대는 오늘 먹이를 먹었다고 해서 내일 먹거리를 항상 획득한다는 보장이 없어서다. 그런데 불편하고 번거로운 행동은 몸에서 에너지를 더 쓰게 만든다. 생존 가능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해야 할 당위성이 있는 행동도 그것이 불편하거나 번거롭다면 우리 몸이 잘 하려 하지 않는다. 유전자가 가진 진화의 본능에 역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행동을 하라고 하면 할까? 일부 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 않는 사람도 상당히 나온다. 강력하게 강제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어떤 행동을 하라고 기준을 정하거나 분위기를 만든다. 그런 것들은 옳고 그름이나 선악 또는 정의와 부정의 등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교육을 통해서 그른 것, 악한 것 그리고 부정의 한 것을 하지 말라고 한다. 동시에 옳은 것, 선한 것 그리고 정의로운 것을 하는 사람은 숭상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한 사람에겐 명예에 손상을 준다. 해야 할 행동을 하지 않은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사회가 해야 한다고 정한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방법이다.

그 결과 심한 경우 누군가가 다치거나 죽는다. 유전자에서 나오는 본능과 역행하는 상황이 되면 사회가 하라는 것을 못 하거나 안 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생긴다. 자신이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주변에 알려지지 않을 때는 괜찮다가 알려졌을 때 문제가 된다. 주변에 알려지면 모욕감이나 수치심이 생긴다. 얼마 전 노회찬 의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지 정당을 떠나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무엇이 그에게 그러한 선택을 하게 했을까? 나는 본능에 역행하는 행동을 요구하는 사회 기준이나 분위기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언론에 알려지지 않았을 때는 잘 살지 않았는가?

사람은 항상 똑같은 환경에 살지 않는다. 주변 환경이 변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유전자는 변화된 환경에 맞게 적응한다. 즉, 상황에 따라 행동을 바꾼다. 이런 사람 행동의 기원은 유전자다. 그런데 이 유전자는 언제나 항상 생존 가능성 향상을 추구한다. 유전자가 옳고 그름, 선악 그리고 정의와 부정의 등을 알까? 자신이 어떤 환경에서 살게 될지 알까? 당연히 모른다. 이런 것을 모르는 유전자에서 출발하는 인간 행동이 인위적 기준에 항상 잘 따를까? 상황에 따라 행동이 바뀔 수 있고 그렇게 되는 것이 사람다운 행동이다.

이성이 인간 행동을 완벽히 제어할 수 있다면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항상 맞추는 것이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 행동은 그렇지 않다. 때때로 이성이 잘 작동하지 않는다. 본능과 감정에 따라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주위 여건이나 환경도 달라진다. 또한, 인간이 만든 사회적 기준이 절대불변의 진리도 아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내용이 변한다. 옳다고 믿었던 것이 그렇지 않게 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사회가 하지 말라고 한 소위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쁜 행동을 해도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다. 서로 협력해 부당한 방법을 써서 법망을 피해 돈이나 권력을 얻으면 잘 살 수도 있다. 사회가 하지 말라는 행동을 한 사람이 남보다 더 잘 살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런 모습을 본다면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사회가 요구하는 선하고 옳고 정의로운 행동을 할까? 아니면 행동은 그렇지 않으면서 그렇게 했다고 거짓말을 할까? 지금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더 많을까?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사람들은 거짓말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배운다. 거짓말하라고 가르치는 사람을 아직 못 봤다. 그런데 거짓말 한 번도 안 하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단언컨대 없다. 여러 가지 까닭으로 정직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 여전히 사람은 평균 하루에 2.14번 거짓말을 한다. 많고 적음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한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거짓말했다는 것을 알면 그에게 욕한다. 거짓말하며 살던 사람도 그렇게 한다. 거짓말 한 자는 나쁜 사람이 된다. 자기 거짓말을 잊어버리고 다른 누군가가 거짓말했다고 욕하는 것이다. 이렇게 누군가를 욕하고 비난하는 이유가 거짓말을 나쁘다 배웠기 때문은 아닐까? 어쨌거나 지구상의 모든 현대 인간은 이런 모순이 있는 사회 속에 산다. 이런 모순 때문에 난 어떤 사회적 기준이나 분위기를 정해 놓고 그것에 맞도록 행동하라고 요구하는 것을 싫어한다. 이런 요구 없이 사람들이 더 잘 살 수 있기를 원한다.

예를 들어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해 사회가 요구하는 행동이 있다고 하자. 이런 행동을 정하는 이유는 미래에 부담을 덜 주기 위해서다. 이 주장도 타당하다. 그래서 사회가 에어컨을 틀지 말라고 요구했다고 하자. 이 요구가 얼마나 잘 지켜질 수 있을까? 이번 여름 에어컨 있는 사람 중에 틀지 않은 사람이 몇 %나 될까? 에어컨을 틀면 그들을 비난해야 하는데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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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이택종 작가

이택종 작가는 강릉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꿈과 낭만 속에서 자랐다. 지난 25년간 만화가와 일러스트레이터로 살았다. 그 동안 여러 출판사에서 중·고등학교 교과서의 삽화 및 만화작업을 했다. 현재는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웹진 ‘e행복한 통일’에 월간 만화를 연재하고 있다.

반대로 온실가스 배출과 관련해서 어떤 행동을 하든 뭐라 하지 않는 사회를 가정해 보자. 심한 더위에 에어컨 튼다고 아무도 나무라지 않는다. 틀어도 그만 안 틀어도 그만이다.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일 뿐이다. 누군가는 에어컨을 튼 아파트 거실에서 느긋하게 책을 읽고 음악감상을 한다. 다른 누군가는 다음 세대를 위해 더위에 땀을 뺀다. 이 경우 에어컨을 못사는 능력을 한탄할지 몰라도 이산화탄소 배출 감소를 위한 노력을 안 했다고 비난하지는 않는다.

이런 사회는 타인에 대한 비난을 줄일 수 있지만, 온실가스를 줄일 수는 없다. 앞에서 말한 선악, 옳고 그림 그리고 정의 부정의도 마찬가지다. 비난을 피하자고 온실가스 배출이나 인간 사회에 필요한 행동을 막무가내로 내버려 두자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타인을 비난하지 않으면서 온실가스를 줄이는 것을 포함해 사회가 요구하는 행동을 하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인간 본능 중 가장 강력한 것을 활용하는 방법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올리는 행동이라면 거의 무조건 한다. 이성에 호소할 필요도 없다. 이런 행동은 하지 말라고 강제해도 한다. 인간도 살려고 태어나지 않았는가? 이런 본능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이것을 거꾸로 이용하자는 것이다.

이 방법은 우리 사회가 원하는 또는 필요한 행동을 하지 않을 때 욕이나 비난 등을 할 필요가 없다. 단지 사회가 요구한 행동을 한 사람에 대해 그의 생존 가능성을 올려주면 된다. 사회가 원하는 행동을 실천한 자가 돈도 더 벌고 지위도 더 올라가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신의 생존 가능성 향상을 위해서, 즉 자기가 더 잘살기 위해서 사회가 요구하는 행동을 한다. 이런 사회가 되면 비난도 사라지고 사람이 소위 나쁜 행동을 덜 한다.

앞에서 난 약자를 배려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런데 사회·경제적 약자나 자식에게 오는 피해를 줄이고 그들을 먼저 배려하는 사람들을 더 잘살게 해주면 어떨까?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행동을 할까? 그렇지 않다. 본능적으로 약자를 더욱 사랑하고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할 것이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이런 방식을 이용하면 강자와 약자 사이의 갑질도 사라질 것이라 믿는다.

따라서 나는 앞으로 우리 사회가 이런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려면 우리가 좀 더 분석적이어야 한다. 기존의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비판적 사고도 가져야 한다. 사회 문제에 대한 해법을 만들 때마다 본능에 따른 인간 행동의 원리를 적용할 필요도 있다. 행동경제학이 발달한 것도 이런 취지 아닌가? 동시에 누군가 어떤 행동을 했거나 말았거나 상관없이 있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상대방을 존중해야 한다. 다름을 수용하고 약자를 배려하며 사람을 사랑하는 법도 행동으로 익힐 필요가 있다.

어쨌거나 이미 알려진 기후변화 적응 방법들 가운데 이런 것을 하나 권하라고 한다면? 거의 없지만 난 푸른 아시아가 하는 일을 선택할 것이다. 나무를 심고 숲을 가꾸고 늘리되 그것이 살아가는 방법이 되도록 하는 전략이다. 이 전략은 나무를 심고 가꾸어 만들어진 숲을 통해 사람들의 삶이 가능할 정도의 경제적 이익이 생기도록 사회 구조를 바꾸는 것을 포함한다. 그 중 가능한 한 가지가 이산화탄소 배출허용권 제도일 수도 있다. 다른 것도 얼마든지 생각해 낼 수 있다. 서울에 나무 심는다는 것만으로 돈을 벌어 잘 살 수 있다면 누가 안 하겠는가? 누군가는 지금 있는 자기 집을 헐어서라도 나무를 심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숲은 온실가스(이산화탄소)를 흡수할 뿐 아니라 주변 온도를 낮춘다. 광합성을 위해 기공을 열 때 증산작용이 일어나며 증발하는 물이 주변 열을 흡수하기 때문이다. 개울가에 온도가 낮은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도시에 숲을 만들고 물이 있는 공간을 많이 만들면 열섬현상(더워진 도시 대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도시를 맴돌아 도시 온도가 올라가는 현상)을 줄인다. 도시 대기 온도가 낮아진다. 더구나 숲은 초미세먼지도 함께 줄인다. 쾌적감(amenity)을 주니 사람에게 행복감도 올려준다. 만일 이번 더위 때 서울이 나무와 숲이 많은 생태 도시였다면 어땠을까? 우리가 에어컨을 좀 덜 틀었을 것 같다. 전기 사용이 줄었을 것이며 이산화탄소와 오염물질 배출도 낮았을 것이다. 자식과 약자의 고통에 대한 걱정도 덜 했을 것이다.

서울. 이 도시는 아직 회색빛이다. 숲이 많지 않다. 도시화로 인해 온도도 상승해 있다. 그런 상태에서 이번 여름을 맞았다. 당장 사람이 죽어 나갈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 직면해 보니 오래전 보았던 영화 인터스텔라가 생각난다. 지구 환경 변화로 인간이 지구상에서 살 수 없게 만들어 우주의 다른 행성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던 미래를 가정한 영화다. 지금 우린 에어컨을 켜고 또 전등을 켠다. 뿐만이 아니라 수출과 수입을 포함해 많은 물건을 만들고 매입한다. 그런데 그것들은 모두 온실가스를 내보낸다. 사람이 음식을 먹고 어쩔 수 없이 방귀를 뀌는 것과 같다. 그렇게 열심히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산다.

이런 삶을 살 때 다가올 미래는? 얼마 전 내가 뀐 방귀 냄새를 피해 아들은 자기 방으로 갔다. 내가 아들을 거실에서 내쫓은 것이다. 이것처럼 지금 내보내는 온실가스가 미래에 인류를 우주로 내몰지는 않을까? 아들이 다른 방으로 간 것처럼 인류가 우주의 어딘가로 갈 수 있다면 또 다르다. 그런데 지구 밖으로 나갈 곳은 있나? 가장 가까운 태양계도 4.4광년 떨어져 있다. 빛의 속도로 4.4년을 가야 한다. 우주선으로 간다면 수십 만 년 걸리는 거리다. 못 간다. 가까운 화성을 말하지만 대기도 사람이 살 수 없고 너무 춥다. 당장 무더위로 사람이 죽는 문제의 해법치고는 좀 요원해 보인다.

어쨌거나 사상 초유의 무더위 속에서 더위에 지친 자신을 위해 에어컨을 켜겠는가? 미래와 약자를 걱정해 에어컨을 끄겠는가?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어떤 선택을 하거나 상관없이 훌륭하며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둘 다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난 에어컨을 켜겠다. 그리고 시원한 방에 앉아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인간의 사랑(인 또는 자비)과 이성 능력을 극대화하겠다. 이를 위해서는 각자가 자기가 맡은 역할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나름의 역할에 충실하면 국가의 능력은 향상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향상된 능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국가 시스템을 만들고 도시 구조를 바꾸어 이산화탄소 배출을 감소시키겠다. 이렇게 한다면 에어컨을 틀어도 온실가스는 배출은 더 줄어들고, 미래에 약자를 포함한 다른 모든 사람이 좀 더 시원한 여름을 만날 수 있다. 더불어 자신의 양심을 지키며 약자를 배려하는 사람들이 더 잘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인류의 지속성을 높이는 방향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