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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92-[엄민용 전문기자의 <우리말을 알아야 세상이 보인다⑧>] 하루바삐 없애야 할 일본말 찌꺼기

우리말의 7할이 한자말입니다. 따라서 한자말을 쓰지 않고서는 일상생활을 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다 보니 일본에서 만들어진 한자말이 우리말 속에 쉽게 녹아들기도 했습니다. 이는 일본이 우리보다 선진 문물을 먼저 받아들이면서 그에 합당한 말을 먼저 만들어 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국립국어원도 흔히 일본식 한자말로 불리는 상당수를 국어의 틀 안으로 들여 놓았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국민들이 언어생활을 하는 데 큰 혼란을 겪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아직도 꽤 많은 일본식 한자말이 순화 대상에 올라 있습니다. 이들 말 중에는 우리와 상관없이 오직 일본의 생활환경을 뿌리로 하는 것도 있고, 우리식 한자말이 있는데 이를 외면하고 별 생각 없이 일본식을 자주 쓰는 것도 있습니다.
이런 말들은 문젯거리입니다. 우리말로 대체할 수 없다면 모를까, 멀쩡한 우리말을 놓아두고 굳이 일본식 한자말을 쓸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정신이 깃든 낱말을 아무 생각 없이 쓰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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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번 
‘18’이라는 숫자는 얼핏 욕처럼 들려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노래를 부르거나 장기자랑을 할 때면 ‘너는 18번이 뭐니’라거나 ‘내 18번곡은 ○○야’ 등으로 말합니다. 참 묘하지요. 
결론부터 말하면 ‘18번’은 순전히 일본의 문화입니다. 이 말은 일본의 대중 연극인 가부키에서 유래했습니다. 장(場)이 여럿으로 나뉘는 가부키는 장이 바뀔 때마다 작은 공연을 합니다. 그 단막극 중에서 크게 성공한 18가지 기예(技藝)를 이치가와 단주로라는 가부키 배우가 정리했는데, 사람들이 이를 가리켜 ‘가부키 광언(狂言:재미있는 말) 십팔번’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또 18가지 기예 중 18번째 기예가 가장 재미있었다고 해서 ‘십팔번’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그런 ‘18번’을 우리가 쓸 이유는 없습니다. ‘18번 곡’은 ‘애창곡’으로 쓰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저의 18번은 춤 입니다’ 따위에서의 ‘18’번은 ‘장기’로 고쳐 쓰면 충분하고요.

2. 기라성 
일본 사람들은 우리말의 ‘반짝반짝’을 ‘기라기라(ぎらぎら)’라 하고, 이를 적을 때는 한자에서 ‘기라(綺羅)’를 빌려다 씁니다. 여기에 ‘보시(ぼし)’로 읽히는 한자말 ‘성(星)’을 갖다 붙여 ‘기라보시(ぎらぼし)’라 읽고 ‘기라성(綺羅星)’이라 적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중국에서 코카콜라를 [커커우커러]로 소리 내면서 ‘可口可樂(가구가락)’으로 적는 것과 같은 표기입니다.
이처럼 제 나라 말로 제 생각을 다 펼칠 수 없는 일본말의 한계 속에서 불구적으로 태어난 것이 ‘기라성’인데,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언어로 말하고 적는 우리가 그 불구의 말을 그대로 좇아 쓴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기라성’은 ‘내로라하다’나 ‘한가락 하다’를 활용해 쓰는 게 훨씬 낫습니다. ‘내로라하는(한가락 하는) 선배들이 다 모였다’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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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수부지 
우리나라의 젖줄인 ‘한강’ 하면 ‘고수부지’가 먼저 떠오를 정도로 ‘고수부지’는 아주 익숙한 말입니다. 
그런데요. ‘고수부지(高水敷地)’는 한자 그대로 보면 “높은 물”을 뜻하는 ‘고수’와 “비어 있는 곳”을 의미하는 ‘부지’의 합성어입니다. 즉 큰 물이 날 때면 물에 잠기는 하천 언저리의 터를 말하는 거지요. 
이 말은 1980년대 한강 주변을 정리하고 시민공원 등을 조성할 때 우리말을 잘 모르는 공무원들이 무심코 가져다 붙인 것인데요. 그 뿌리는 순전히 일본말입니다. ‘고수’는 일본어 ‘고스이코지[高水工事:こうすいこうじ]’의 줄임말이고, ‘부지’는 빈 터를 뜻하는 일본어 ‘시키지(しきち)’에서 온 말이거든요. 
그래서 1986년 ‘한국땅이름학회’가 서울시에 시정을 건의해 현재 ‘한강 고수부지’는 ‘한강시민공원’으로 개정됐습니다. 아울러 국립국어원은 ‘고수부지’를 ‘둔치’로 순화해 쓰도록 권하고 있답니다. 
이 밖에 ‘무주택 세대’ 따위로 많이 쓰이는 ‘세대(世帶)’도 순전히 일본식 한자말로, 우리말로는 ‘가구(家口)’라고 해야 합니다. ‘세대주’도 당연히 ‘가구주’로 써야 하지요. 또 ‘이서(裏書)’는 ‘배서(背書)’나 ‘뒷보증’, ‘고지(告知)’는 ‘알림’, ‘회람(回覽)’은 ‘돌려 보기’ ‘견습(見習)’은 ‘수습’, ‘고참(古參)’은 ‘선임(자)’이나 ‘선참(자)’, ‘기합(氣合)’은 ‘기 넣기’와 ‘얼차려’, ‘시말서(始末書)’는 ‘경위서’로 순화해 쓰도록 국립국어원이 권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