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88-[엄민용 전문기자의 <우리말을 알아야 세상이 보인다④>]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면 죽는다’는 미신의 비밀
세상에는 참 많은 미신이 있습니다. ‘이름을 빨간색으로 쓰면 죽는다’는 얘기도 그런 미신 중 하나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누가 자신의 이름을 빨간색으로 쓰면 기겁을 합니다.
하지만 이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미신입니다. 더욱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미신입니다. 생긴 지도 얼마 안 됐고요. 가까운 이웃 나라들인 일본과 중국은 물론이고 우리와 문화가 비슷한 북한에도 그런 미신은 없습니다. 북한에서는 오히려 자신들의 지도자라는 사람들 이름을 산하 곳곳에 붉은 글씨로 써 놓기도 했지요.
그뿐 아닙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역시 붉은 글씨로 이름을 쓰는 것은 무척 싫어하면서 도장으로 찍는 이름은 다들 붉은색입니다. 참 묘하지요. 이름을 붉은 글씨로 써서는 안 되고 찍는 것은 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이지요.
사실 우리 조상들은 붉은색을 길한 색으로 여겨 왔습니다. 동지에 팥죽을 먹는 것도 ‘붉은색이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는 믿음 때문이고, 조선시대 임금들이 붉은색 용포를 입은 것 또한 붉은색의 좋은 기운을 받기 위함이지요. 복은 바라며 쓰는 부적도 온통 붉은색입니다.
출처: 두산백과
그렇다면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면 죽는다’는 말도 안 되는 미신은 왜 생겨난 것일까요? 여기에는 몇 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째는 붉은색이 피를 떠올리게 하고, 피가 죽음과 연관되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 기피하게 됐다는 설입니다. 하지만 ‘피’는 “젊은 피” “피가 끓다” 따위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죽음’보다는 ‘생명’을 의미하는 말로 더 널리 쓰입니다.
둘째는 세조가 조카를 밀어내고 왕위에 오를 때, 한명회 등이 궁중행사의 방명록에 반대파 이름을 빨간색으로 표시하고 척결한 사건 때문이라는 설입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때 임금이 공신에게 붉은 글씨의 녹권(錄券)을 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조상들은 붉은색을 불길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셋째는 중국 진시황제와 관련된 설입니다. 예부터 중국에서는 빨간색을 길하게 여겼습니다. 이 때문에 진시황제가 붉은색을 독차지하려고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이 붉은색을 사용하면 모조리 죽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신빙성이 부족합니다.
이들 이야기보다 설득력 있는 것은 6·25전쟁 때 국군 전사자통보서에 이름을 빨간색으로 적은 것에서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면 죽는다’는 말이 나왔다는 주장입니다. 즉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면 그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라 죽었기 때문에 빨간색으로 표시를 한 것입니다.
이렇게 원래는 좋은 상징인 붉은색 글씨가 죽음의 상징으로 변한 것처럼 본래는 좋은 말이 현재는 나쁜 말로 변한 것도 있습니다. ‘고문관’도 그중 하나입니다. ‘고문관’은 현재 “군대나 사회에서 어수룩한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로 널리 쓰입니다.
그러나 본래 고문관(顧問官)은 “자문(諮問)에 응해 의견을 말하는 직책을 맡은 관리”를 뜻하는 말입니다. 1945년 광복 이후 미국의 군사지원을 받게 되면서 우리나라에 군사자문가들이 파견되는데요. 이들이 바로 ‘고문관’입니다.
그런데요. 미국인 고문관들은 국내 실정을 잘 모를 뿐 아니라 우리말도 서툴렀습니다. 당연히 일 처리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죠. 말이 안 통하니 서로들 무척 답답했을 겁니다.
이 때문에 언제부터인가 군대에서 어리석거나 굼뜬 행동을 하는 사람을 고문관이라 부르게 됐고,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이 퍼트리면서 사회에서도 “어리숙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