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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86-[엄민용 전문기자의 <우리말을 알아야 세상이 보인다②>] 설날은 ‘구정’도 ‘양력설’도 아니다

프로필_엄민용1
유난히 추운 날이 계속 되고 있지만, 봄이 코앞까지 왔습니다. 아직도 코끝을 찡하게 하는 찬바람이 씽씽 부는데, 웬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요? 하지만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봄·여름·가을·겨울의 기준을 무엇으로 삼으시나요? 혹시 입고 다니는 옷의 두께나 주변에서 피고 지는 꽃을 보며 대충 짐작하시나요? 아마 다들 그러실 겁니다.
하지만 우리 조상님들은 아주 정확한 4계절의 기준을 정해 놓으셨답니다. 음력 1~3월은 봄, 4~6월은 여름, 7~9월은 가을, 10~12월은 겨울이지요. 음력 8월 15일인 추석을 중추절(中秋節)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가 ‘8월 15일’이면 날짜로 가을의 딱 중간이기 때문이랍니다.
이렇듯 우리는 예부터 음력을 기준으로 생활해 왔고, 당연히 음력이 문화의 기본이 됐습니다. 그런데 일제에 의해 양력 사용이 강요된 여파로 ‘우리의 기준’이 많이 흔들렸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양력 1월 1일을 ‘신정’이라 하고, 이에 대립해 음력 1월 1일을 ‘구정’이라고 부르는 일입니다. ‘구정’에는 우리의 민족혼을 말살하려 한 일본의 교묘한 술책이 담겨 있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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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음력을 쓰기 시작한 것은 1895년께로, 이후 일본은 우리 고유의 명절인 ‘설’을 없애려 무던히 애를 씁니다. 설 며칠 전부터 방앗간 영업을 금지하고, 설날에는 학생들의 도시락을 뒤져 제사음식을 싸 온 학생은 벌을 주기도 했지요. 그러면서 양력 1월 1일을 ‘신정’으로, 음력 1월 1일을 ‘구정’으로 여기도록 교육했습니다. ‘신정’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바람직한 날로, ‘구정’은 하루빨리 없애야 할 ‘구습’으로 여기도록 한 것이지요.
여러분은 자신의 집에 신제품이 가득한 것이 좋은가요? 아니면 구닥다리가 넘쳐나는 게 좋은가요? 또 자신이 ‘신세대’로 불리기를 원하나요? 아니면 ‘구세대’로 불리기를 바라나요? 당연히 신제품을 좋아하시고, 신세대로 불리기를 바라시겠지요. 그런 말 씀씀이에서 알 수 있듯이 ‘신정’은 긍정적 개념을, ‘구정’은 부정적 개념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그런 영향으로 1980년대 중반 그동안 부정적 이미지로 불리던 ‘구정’을 ‘민속의 날’로 이름을 바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옛 이름 ‘설날’도 찾게 됐습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설 앞뒤 날까지 합쳐 3일이 공휴일로 지정됐습니다. 올해에는 일요일이 더해져 연휴가 4일이나 되네요.
아무튼 지금 우리에게는 ‘신정’과 ‘구정’의 구분이 필요 없습니다. ‘구정’이 ‘설날’이 됐으니, 더 이상 ‘신정’이 필요 없게 된 것이지요. 아울러 설날은 당연히 음력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굳이 ‘음력설’이라고 부를 필요도 없습니다. 일본의 설날(?)은 멋진 ‘신정’으로 부르고, 우리의 설날은 못된 ‘구정’으로 부르는 언어습관. 이거 분명 잘못된 언어 습관 맞지요?
그리고 코앞으로 다가온 설날이 바로 봄의 시작이라는 것도 꼭 알아 두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