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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몽골] 스스로의 모순에 관하여 – 김찬미 단원

조림사업을 하면서, 주민자치사업을 하면서, 스스로가 참 모순된 사람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머리로 생각하는 개발협력의 이상과, 현장에서 느끼는 나의 감정 가운데의 괴리가 퍽 컸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내 모습을 감추고자 때로는 정말 어떻게든 이성으로 내 감정을 다잡기도 했고, 때로는 너무나도 쉽게 자기합리화를 해버리기도 했다.
현장에 있으면서 참 많이도 느꼈던 건, 꼼수를 부리려고만 하면 정말 얼마든지 꼼수를 부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나, 푸른아시아 단원의 경우 사무실과 현장이 매우 떨어져 있기 때문에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부가 파악하기에 어려웠다. 이는 곧 감시와 견제의 기능이 적다는 뜻이고, 그만큼 단원들에게 많은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이었다. 타인으로부터 감시받고 견제 받지 않는 자유는 오로지 자기검열에 의해서만 규제되어진다. 그리고 나는 그 자기검열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는 너무나 큰 오만이었고, 나는 매 순간 참 많이도 무너졌다. 게으름피우고 싶었고, 조금이나마 더 쉬고 싶었다. 다시 말해 당장 내 눈 앞의 주민들에게, 그리고 당장 내 눈 앞에 보이는 조림지 나무들에게 사랑을 덜 쏟고 싶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많은 감정과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니까. 그리고 진심으로 내 모든 것을 내어놓고 다가간다는 것은 참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니까. 진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건 너무나 상처이니까. 그게 무서웠던 것도 같다.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에게 자랑스럽고 싶은 마음이 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떳떳하고,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렇게 행동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두 가지의 행동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비판을 하거나, 혹은 자기합리화를 하거나. 스스로를 자책하고 비판하는 일은 상처가 된다. 때로는 그 자책이 너무 과해져 스스로에 대한 비난이 되기도 한다. 이는 생채기를 낸다. 그리고 그 생채기가 미처 다 아물지 않았을 때 스스로에 대한 비난을 또 하게 된다면, 우리는 무너지게 되기도 한다. 누구보다 스스로를 믿어줘야 할 사람은 나인데, 내가 나의 편이 될 수 없게 된다. 그렇기에 자책과 비판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후자를 선택한다. 나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노라고. 스스로에게 돌려져야 할, 그리고 충분히 숙고되어야 할 그 화살을 아예 다른 곳으로 돌려버리고 만다. 그러면 내 탓이 아닌 게 되니까. 적어도 상처받고 아플 일은 없으니까. 하지만, 우리 모두는 안다. 자기합리화는 그 상황을 해결하고 재발을 막기는커녕, 그 순간에 대한 자위책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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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중순에 이 곳 몽골에 들어왔다. 그리고 지금은 12월도 어느새 저물어가고, 2017년이 채 며칠도 남지 않았다. 내가 아직 현실을 직접 본 적이 없고 먼발치에서만 바라보고 있을 때, 즉 ‘장기봉사활동을 하면서 현실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어!’라고만 생각했던 때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현장에는 참 많이도 산적해있었다. 그래서 그 민낯을 이제 적어도 조금은, 덮여있던 얇은 껍질 정도는 벗겨본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현장 안에서의 활동가로서의 나의 모습이 어떤지 참 많이도 느꼈다. 나는 내 생각보다 약했고, 쉽게 휘둘렸고, 쉽게 타협했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가증스러울 정도로, 아닌 척 했다. 그런 사람이 아니고 싶었다. 내 이상과 신념을 잃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매 순간 가슴 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쩌면 이 글은 나 스스로 다이어리에 적고 끝내고 되는 글일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 다이어리에 이미 이런 글을 여러 번 적었다. 그냥 속으로는 수십, 수백 번도 더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무나도 연약해서, 쉽게 넘어져 버려서, 그러면서도 가증스럽게 아닌 척 자기합리화를 자꾸만 해버려서. 그런 가식적인 스스로에 대한 공개비판이다. 계속해서 개발협력의 길을 걷고 싶은 사람으로서, 진심이라는 용기를 낼 수 있도록 하는 스스로에 대한 채찍질이다. 플라톤의 철인이 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자기합리화 없이도 스스로에게 떳떳한 내가 될 수 있기를. 자기합리화가 정말 합리적인 일이 아니라, 스스로를 자위하고 기만하는 합리화라는 것을 스스로가 알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