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72-[이천용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아름다운 숲 탐방기] 자연에 인간의 마음을 담아낸 장성 요월정 원림(園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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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요월정 입구에 있는 소나무와 배롱나무숲

 

전남 장성은 백양산의 단풍, 축령산의 편백숲이 자랑할만한 자연이고 하서 김인후 선생이 큰 인물로 꼽는다. 그러나 여기저기에 잘 알려지지 않은 아름다운 나무와 숲이 많은데 특히 황룡면 황룡리에 있는 요월정(邀月亭)은 기가 막힌 경관을 가진 곳에 위치한다. 요월정의 요는 ‘맞이할 요(邀)’자이므로 ‘달맞이 정자’라는 의미이다. 문필봉이 3개나 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요월정은 소쇄원(瀟灑園)과 더불어 조선 후기 호남 문사들이 즐겨 찾던 명소이다. 숲과 자연을 그대로 두고 적절한 자리에 정자를 배치한 원림(園林)은 자연에 인간의 마음을 담아낸 곳이다. 원림이라 이름 붙인 것은 담양 명옥헌원림(鳴玉軒苑林), 담양 독수정원림(獨守亭園林), 장흥 용호정원림(龍湖亭園林)과 부춘정원림(富春亭園林), 보길도 윤선도원림(尹善道園林), 화순 임대정원림(臨對亭園林), 순천 초연정원림(超然亭園林), 담양 소쇄원(瀟灑園), 예천 초간정원림(草澗亭園林), 장성 요월정원림(邀月亭園林) 등이 있는데 초간정만 빼곤 모두 전남에 위치한다.

요월정 원림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70호로서 조선 명종시대의 공조좌랑이었던 김경우가 낙향하여 황룡강변에 정자를 짓고 소나무와 배롱나무를 심어 산수를 벗한 곳이다. 당대의 명사인 김인후, 기대승, 양웅정 등이 이곳에서 시를 읊었으며, 시가 현판에 새겨 있다. 일화에 의하면 후손 김경찬이 이 정자의 경치를 찬양하여 조선 제일 황룡리라고 현판하였는데 그러자 조정에서는 “장성 황룡이 조선제일이면 한양은 어떠냐”라고 묻자 “천하에 제일”이라고 해서 화를 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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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수평으로 뻗은 소나무

 

황룡정에서 새로 만든 100미터 정도의 계단길을 오르면 곧 요월정이다. 계단 좌우에는 수평으로 눕거나 비스듬하거나 수직으로 치솟은 수십그루의 노송들이 벗하고 요월정 아래 비탈면에는 100년쯤 된 60여 그루의 배롱나무가 가지를 서로 교차한 채로 얽혀있다. 특히 여름에는 배롱나무의 붉은 꽃으로 인하여 풍취를 더한다. 임진왜란 때는 여인들이 왜구로부터 절개를 지키기 위해 요월정 앞 바위에서 강으로 몸을 던졌는데 배롱나무 꽃잎과 같다고 하여 절벽을 낙화암이라 이름하고 그들의 고귀한 뜻을 후세에 남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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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겨울에도 미끈한 수피를 자랑하는 배롱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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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요월정과 간판

 

요월정에 올라서면 탁트인 들판 건너 옥녀봉이 보여 마음이 시원하다. 주변에는 몇 개의 집이 있어 경관을 해치지만 느티나무와 상수리나무 거목들이 있어 어느 정도 윤색한다. 동산 정상부근에는 묘가 있고 주변에는 아름다운 소나무들이 큰 키를 자랑하면서 파란 하늘에 옹기종기 잎과 가지로 장식을 한 모양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다. 운이 좋게 맑게 갠 하늘을 배경삼아 올려다본 소나무숲의 모습은 압권이다. 직경은 50센티미터 내외, 수고는 20미터로 죽 벋었지만 가끔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거나 계단식으로 생긴 줄기, 수관부속에서 이리저리 휜 가지들은 새 풍경을 만든다. 수관은 서양 백작부인이 비스듬히 쓴 모자와 같은 모습을 보인다. 바닥에는 초록 융단이 깔려 훨씬 안정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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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 요월정 측면에 있는 아름다운 소나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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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 하늘 끝에 잎과 가지를 단 소나무

 

소나무숲 사이로 난 길은 약간 경사가 지면서 어린 편백숲과 소나무 교목숲이 어울린 곳을 지난다. 태풍 루사가 남긴 상처로 노송이 쓰러진 다음에 식재한 나무라고 한다. 숲의 끝에는 묘와 약간의 공터가 있으며 반대쪽 경관이 한눈에 보인다. 높은 곳에 위치해도 바람에 보호되는 아늑한 느낌을 준다. 내려오는 길은 해송 10여 그루가 소나무들과 대조를 이루고 삼나무를 가로수처럼 심었다. 줄사철나무들이 활엽수들을 휘감고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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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7. 솔숲사이 오솔길

 

주차장 앞에는 황룡강을 막고 넓게 호수처럼 만든 용소가 있는데 수련, 붗꽃, 애기부들 등 수생식물을 관찰할 수 있다. 이무기가 살다가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이곳에서 보는 요월정과 주변 소나무들의 군무는 아침빛에 더욱 빛나서 멋이 있다. 겨울에는 나무를 확연하게 볼 수 있으며 여름에는 배롱나무꽃이 그 주변 나무들과 어떻게 조화를 부릴까가 궁금하다. 한 시점의 숲만 보고 그것이 전부인양 이야기 할 수 없는 곳이 숲이며 또한 숲은 안팎에서 감상해야 제대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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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8. 용소

 

장성이 낳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 하서 김인후 선생은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과 함께 학문을 닦고 1540년(중종 35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에 등용되었으며 이어 박사·설서·부수찬을 지냈다. 그는 호남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경기 김안국과 조광조, 영남의 이언적과 이황, 충남의 조식, 서울의 이이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 시대의 지도자였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관록을 가진 재상들이 젊은 문신들을 내몰아 죽이거나 혹은 유배시켰을 때이며 기묘사화가 일어나 뛰어난 학자들이 정치적인 혼란 속에서 뜻을 펴지 못한 채 은거하여 독서에만 전념했던 시기이다.

김인후는 송시열이 그의 신도비에 쓴 글처럼 ‘도학과 절의(絶義:절개와 의리)와 문장을 겸비한 인물로 하늘이 도와 우리나라에 내려 준 사람’이었다. 절의의 한 예를 들어보자. 그는 34세때(중종38년) 임금에게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렸다.

“예로부터 선한 정치를 하는 군주는 어진 인재를 가까이 해서 선비의 풍습을 바르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어진 인재를 가깝게 하면 임금을 도와 백성을 교화시킬 수 있을 것이고 선비의 풍습을 바르게 하면 사람이 지킬 떳떳한 윤리가 밝혀져 세상을 두터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번의 기묘사화는 죄가 아니심을 밝히시고 날로 두려운 마음으로 수양하사 정의와 악을 잘 가려서 사회기강을 세우시옵소서.”

어진 인재를 등용하고 기강을 바로 잡는데 힘쓰도록 강조하면서 중종이 저지른 기묘사화가 바른 선비들을 희생시킨 사건임을 깨달아 뉘우치고 신원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가 정사를 밝게 분별하고 직간(直諫)에 과감한 성격이 상소문에 절절히 나타나 있다.

그는 명종 즉위 후 을사사화를 겪으면서 병을 핑계 삼아 더 이상 관직에 머무르지 않고 낙향하여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는 도학의 정통을 발전시켰는데 도학자의 행동원칙은 나아가 겸선천하(兼善天下: 세상에 나가 좋은 일을 한다)를 하며 물러가 독선기신(獨善其身: 홀로 몸을 닦아 품덕을 기른다)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권력을 버리고 독선기신에 전념할 때 진정한 산림파(山林派) 또는 사림파(士林派)라고 부를 수 있다.

학자로서 최고의 영예인 홍문관교리로 부름을 받고 내키지 않는 관직의 길을 떠날 때 그는 술을 여러 말 준비하였다. 길을 가면서 대나무 숲이나 꽃이 핀 곳이 있으면 쉬엄쉬엄 가다가 술이 떨어지자 집으로 되돌아와 버렸다. 그는 글로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간신의 화를 입은 인종을 위한 절의를 지켰다. 율곡은 의리가 바른 점은 김인후와 비길 사람이 없다고 지적하였다.

논설과 의리가 명백했던 선비 김인후는 1560년 정월 “내일은 보름이니 정성들여 생수를 갖추어 사당에 행전케하라”더니 의관을 단정히 하고 무릎을 끓고 앉아 제사를 모시면서 자녀에게 “내가 죽으면 을사년 이후의 관작일랑 쓰지 말라”고 유언하고 이튿날 유연히 세상을 떠났다. 김인후와 같은 멘토가 대한민국에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의 미래는 상당히 희망적일텐데…

 

 

글/사진 : 이천용 푸른아시아 기획이사·나무와숲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