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66-[이천용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아름다운 숲 탐방기] 퇴계가 지어준 예천 선몽대 소나무숲
사진 1. 내성천변에 늘어선 노송들
지방 깊숙한 곳에 숨은 숲을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과거 농로였던 곳까지 다 포장을 하여 농민들은 다니기가 훨씬 수월해졌으나 초행인 사람들은 새로 포장한 무수한 길 때문에 지도를 보고 찾기가 어렵다. 다행히 네비게이션이 시키는 대로 따라가면 목적지에 쉽게 도착하나 지도를 찾으면서 틀린 길로 갔다가 돌아 나오기도 하면서 미지의 자연과 풍광을 감상하는 재미가 사라졌다.
선몽대(仙夢臺)는 여름 강수욕철을 지나면 한가롭게 유람할 수 있다. 입구까지 차 한대만 갈 정도로 길이 좁고 주차장 시설도 크지 않기 때문이다. 선몽대 가는 길가의 드문드문 서 있는 소나무들의 형상이 예사롭지 않다. 멀리 오른쪽 큰 산 비탈은 청청한 소나무로 완전히 뒤덮었다. 죽은 나무들도 보이지만 제법 붉은 수피를 가진 소나무들이 가지런하게 큰 키를 자랑한다. 강원도의 날렵한 소나무를 닮았나 보다.
사진 2. 강 반대편 산기슭에 청정한 소나무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만든 백사장에 눈이 부신다. 강물이 꾸준히 모래를 실어 날라 옛모래를 덮어버리고, 모래를 깨끗하게 씻어 준 결과이다. 예천에서 안동 방향으로 흐르는 내성천의 강물과 십리에 이른다는 넓게 펼쳐진 백사장이 역사적 유래가 깊은 선몽대와 숲이 어우러져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선몽대 숲은 선몽대와 그 뒤편 백송리 마을을 보호하기 위하여 조성된 숲으로서 수해방비림, 방풍림, 수구막이숲 및 비보림 등 여러 가지 역할을 하는 선조의 전통적인 풍수사상이 깃든 곳이다. 선몽대 부근은 기러기가 내성천에서 풍부한 먹이를 먹고 백사장에서 한가로이 쉬는 형이라고 하여 풍수상 평사낙안형(平沙落雁形)이라 전하고 있다.
?사진 3. 시원한 강바람과 소나무그늘이 주는 쾌적한 공간
눈앞에는 거대한 소나무들이 바람에, 빛에 이리저리 잎을 제치며 독특한 풍경을 형성한다. 직경이 대체로 60~80센티미터이나 어떤 것은 1미터도 더 된다. 100~200년 나이의 20여그루 소나무 노거수들 곁에 커다란 은단풍나무이 마음껏 가지를 뻗고 있다. 넓은 공간에 홀로 자라서인지 직경이 80센티미터이고 수고가 15미터인데 지상 1.5미터 높이에서 9개의 가지를 내어 수형을 둥글게 만들었다. 새로 정비하면서 버드나무 등은 다 베어버려도 은단풍은 너무 장대하여 차마 베지 못한 듯하다.
사진 4. 드물게 보는 거대한 은단풍나무
선몽대숲과 같이 굵은 소나무들이 집단으로 강가에 선 것은 매우 드물다. 넓은 강가에 알맞은 간격으로 늘어선 나무들이 자유를 만끽하며 솔향과 솔바람을 낸다. 부분적으로 가지가 부러진 것이 안타깝지만 인고의 세월을 거쳐야 거듭나는 까닭에 아쉬워 할 수만은 없다. 30여 그루 중 10그루만 보호수로 지정한 표석이 있었는데 최근 명승으로 지정되는 바람에 표지석을 산비탈쪽으로 옮겨 과거에 무더기로 보호수를 지정했다는 증거를 남는다. 수년전 여러 종류의 나무를 심어 오히려 소나무의 정취를 떨어뜨렸다는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몇 년뒤에 와보니 20여년생 소나무들을 공간에 심어 다음 세대를 준비하고 있어 숲에 대한 관심과 능력이 크게 증가한 것 같아 기쁜 마음이 들었다.
사진 5. 산비탈 솔숲 사이로 낸 산책로
오른쪽 산에는 소나무가 빽빽한데 산밑에 지어놓은 정자는 은행나무를 벗하면서 주변에는 20여 미터나 되는 큰 키의 줄기가 붉은 소나무들이 죽 뻗어 있고 솔숲사이로 산으로 올라가는 산책로를 나무계단으로 만들어 놓았다. 선몽대 뒤로 이어지는 길은 전형적인 소나무 사이로 멀어진다.
숲의 끝엔 새로 지은 집 하나가 보이고 그 뒤로 고택이 있는데 그것이 선몽대이다. 얼마 전만 해도 출입할 수 없었는데 선몽대를 복원한 후 개방하였다. 선몽대로 오르는 계단은 바위를 쪼아 인공적으로 만들었지만 그리 어색하지 않다. 건물의 뒤는 바위에 얹혔고 앞은 5개의 돌기둥을 세워 마치 필로티와 같이 이층 높이로 맞추면서 시원한 강을 바라보게 하였다.
선몽대 솔바람
오천 냇물 산자락 적시고 흘러 솔밭에 이르면
선몽대 정자가 거기에 나래 펴고 앉았다.
한 옛날에는 선녀들 내려와 멱감고
솔바람 타고 잠들어 꿈꾸던 곳
(김동섭)
사진 6. 선몽대 정자 입구이자 측면의 돌계단
선몽대 마루 양쪽에 쪽문을 만들어 문을 열면 좌측의 소나무숲과 우측의 활엽수숲을 볼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왼쪽으로 가면 숲 사이로 산책로를 만들어 깎아지른 바위 아래로 통과하여 산으로 가도록 했다. 사람들이 뜸한지 관목이 우거져 쉽게 접근하기가 어렵다.
사진 7. 산기슭에 돌기둥을 세워 만든 선몽대
선몽대는 명종18년(1563년) 퇴계의 종손인 우암 이열도가 선몽대 뒤쪽에 있는 우암산 중턱에 학심대, 방학정과 함께 만든 것이며 1968년 복원했다. 26세의 우암에게 63세의 할아버지인 퇴계는 “꿈속에서도 그리워하든 곳”이라는 뜻의‘선몽대’란 세 글자를 쓰고 다음과 같은 시를 보내고 서문도 같이 썼는데 정자의 이름은 퇴계가 집에 앉아서 현몽을 해서 지은 이름이라 한다.
선몽대란 제목을 지어 부치다
노송과 높은 누대는 푸른 하늘에 솟아 있고강변의 흰 모래와 푸른 절벽은 그리기도 어렵구나나는 이제 밤마다 선몽대에 기대서니예전에 이런 경치 감상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지 않노라
예천군 호명면 백송리에서 태어난 이열도는 어릴 때부터 여느 아이들과 달리 신중하고 학업에 뜻을 두어 <육경>과 <사서>에 통달했으며 증조할아버지인 퇴계가 매우 사랑해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선조 9년(1576년) 과거에 급제한 후 고위 관직까지 올랐다. 어느 해 경상도 경산에 흉년이 들어 민심이 피폐해지자 고을을 다스릴 책임자로 우암을 천거했는데 그는 부임 즉시 사비를 들여 굶주린 백성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고, 학교를 세워 교육을 널리 전하였으며, 농업을 장려하고, 세금을 골고루 부과하여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하고, 불쌍한 사람을 돌보는 등 불과 1년 여 만에 고을의 민심을 안정시켰다고 한다. 관직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선몽대를 짓고 평생 동안 글을 읽고 후학을 가르치며 자연을 벗 삼고 살았다는데 그가 남긴 한 편의 시를 소개한다.
옛 사람의 가르침 헛된지 오래지만
남긴 뜻 아직 있어 내 마음 같구나.
작은 집 처마기둥 이제야 완성하니
성근 인정 때문에 떠돌지는 않았으리.
작은 정자 오뚝하니 물속에 어리고
나루 멀리 넓은 하늘 훤히 트였구나.
오리와 노을은 온갖 자태 빚어내고
늦바람에 가을비 부슬부슬 내리는구나.
산자락 물가에 우뚝하게 솟았으니
안개대문 솔 창문 비단과 같구나.
스님과 같이하여 자리는 조용하니
세속인연 적음을 요즘에 깨닫네.
선몽대에는 당대의 석학들인 야포 정탁,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청음 김상헌, 한음 이덕형, 우복 정경세 등의 선비들이 써준 축시를 목판에 새긴 현판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우암의 유적비는 숲 앞에 서서 소나무를 몸속에 투영하면서 그를 기리고 있다. 2006년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 19호로 지정되었다
사진 8. 소나무가 투영된 우암 이열도 기념비
주차장으로 나와서 개울을 건너는 나무다리를 지나 산과 강사이의 호젓한 길을 가면 그늘과 강바람으로 인해 시원하게 산책할 수 있다.
글/사진 : 이천용 푸른아시아 기획이사·나무와숲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