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63-[이천용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아름다운 숲 탐방기]-고택 선교장을 둘러싼 아름다운 소나무숲

 

 

이번달 뉴스레터부터 새로운 필진이 선을 보입니다.
푸른아시아 기획이사인 이천용 기획이사께서 <역사와 문화가 깃든 아름다운 숲 탐방기>를 연재합니다. 평생 숲과 나무를 만나며 연구해 온 이천용 기획이사의 글은 풍부한 경험과 현장감 가득한 화제로 독자 여러분들과 동행할 것입니다.

 

선교장과 배후 소나무숲

 

세종대왕 둘째 형인 효령대군의 후손이 자리잡아

강릉의 오죽헌과 경포대 중간쯤에 위치한 선교장은 세종대왕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의 11대손 이내번(1708∼81)이 300년 전에 터를 잡은 이래, 후손들이 100년에 걸쳐 증축했다. 본채만 102칸이나 되는 전형적인 사대부 저택이다. 선교장(船橋莊)은 경포호가 지금보다 훨씬 넓었을 때 집 앞에서 배를 타고 건너다녔다고 해서 ‘배다리집’으로도 부른다. 강릉 해변에서 염전을 일구고 소금을 팔아 부를 축적한 이내번은 영동 일대를 크게 개간해 농민에게 제공했다. 남쪽으로는 삼척과 동해, 북쪽으로는 속초와 양양, 서쪽으로는 횡성과 평창까지 선교장의 농토였고 여기서 추수한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가 다섯 군데나 있었다고 한다. 여느 고택과 달리 집 이름에 ‘당(堂)’이나 ‘각(閣)’ 대신 ‘장(莊)’을 붙인 것도 독립영지를 가진 유럽의 귀족처럼 자급자족 능력을 갖춘 장원(莊園)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선교장은 안채, 사랑채[열화당(悅話堂)], 별당(동별당과 서별당), 정각[활래정(活來亭)],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1967년 중요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되었으며 최근 관동대학교와 함께 한옥체험 등을 할 수 있는 전통문화연구원을 운영하고 있다. 사랑채인 열화당은 1815년 이후가 건립한 것이며 높은 석축 위에 서 있고, 활래정은 그 이듬해 세운 것을 증손인 이근우가 현재의 건물로 중건하였고, 동별당은 약 50년 전에 새로 건립한 건물로서 안채의 동쪽 전면에 있는데 2층으로 된 높은 석축 위에 서 있다. 안채는 동편에 있으며 주옥의 평면구조는 ㄱ자형으로서, 동쪽 끝이 부엌이고 건넌방은 서쪽에 있다. 안채와 행랑채 사이에는 담을 쌓아서 막았으며, 행랑채는 남쪽에 있고 서쪽으로 사랑채에 출입하는 솟을대문이 있다. 동별당 맞은편에 서별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열화당과 노송들

추사 김정희, 흥선대원군도 쉬어간 교류의 장

선교장은 가옥을 둘러싼 담장과 공간이 아름답고 역사적인 건축물로서 신문지상에 자주 등장하며 특별히 집을 둘러싸고 있는 수백년 소나무숲 덕분에 명성이 더욱 빛나는 곳이다. 이곳은 주인의 넉넉한 인심에다 뛰어난 풍광 덕분에 고관이나 시인묵객이 끊임없이 드나들던 명소였다.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구경하기 위해 가는 시인묵객들이 쉬어가기에 적당한 위치에 있어 추사 김정희, 흥선대원군도 쉬어간 교류의 장으로 훌륭한 곳이었다. 

입장료를 받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전통문화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별 수 없겠다고 생각하면서 솟을대문을 들어서니 활래정과 여름이면 연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연못이 보인다. 활래정은 차(茶)방이 딸린 정자 건물로 이 가문의 활달한 기풍을 보여준다. 활래정의 ‘활래’는 주자(朱子)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 마지막 구절 ‘위유원두활수래(爲有源頭活水來)’에서 따온 것이다.조그만 네모 연못이 거울처럼 열리니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 그 안에 떠 있네

이 연못이 이리 맑은 까닭은 무엇인가

샘이 있어 맑은 물이 솟아나오기 때문이지 활래정의 연못은 서쪽 태장봉에서 끊임없이 흘러드는 맑은 물을 공급받고 오래있던 물은 경포호수로 빠져나가 연못의 물은 언제나 깨끗하다. 연못가를 지나 활래정으로 들어가는 작은 문이 월하문(月下門)이이고 양 기둥에 2개의 주련이 걸려 있는데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가 읊은 시다.  

새는 못가의 나무에서 잠자고(鳥宿池邊樹)

스님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린다(僧枯月下門)

시의 의미는 ‘늦은 저녁 선교장을 찾았다면 망설이지 말고 이 월하문을 두드리십시오. 반갑게 맞이하겠습니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활래정앞 연못

300년 소나무와 직경 1m나 되는 굴참나무가 사이좋게 사는 곳

가문 종부의 풍모를 느끼게 하는 안채와 별당 건물들이 시원하게 들어차 있다. 할래정 주변에는 3미터 높이의 작은 나무들이 네그루가 있는데 정자의 시야를 가리지 않게 배치하였다. 뒤에는 회화나무가 거의 고사직전까지 가며 두갈래 줄기를 뻗은 모습이 집의 역사만큼 오래되었다. 오른쪽으로 집을 둘러싸고 있는 언덕위의 소나무숲을 보러 가는 입구에는 감나무 고목이 친근하게 객을 맞이한다.

드디어 소나무숲이다. 300년쯤 된 듯한 소나무 두그루가 넓은 공간에서 제대로 수형을 갖추고 주변의 직경 1미터나 되는 굴참나무와 사이좋게 지낸다. 소나무 하나하나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왜 창원 선생이 소나무를 평생 좋아하고 예찬했는지 이해가 간다. 가지를 이리저리 비틀며 붉은 광채를 뿜어내면 마치 살아있는 착각을 일으킨다. 집 뒷담을 끼고 오르면 오른쪽 비탈에는 소나무와 굴참나무들이 키와 두께에서 쌍벽을 이룬다. 굴참나무가 단독으로 있으면 크게 자라지 못하는데 대감인 소나무의 격려를 받아서인지 직경이 거의 1미터나 되는 것도 있다. 이렇게 굵은 나무가 소나무에 가려 존재감을 잃고 있으나 가까이서 소나무와 공존한다는 사실은 굴참나무입장에서는 대단한 성공이다. 앞에 선 소나무들이 동해에서 장엄하게 떠오른 붉은 해를 받아 수피는 더욱 붉어지고 정기를 받아 더욱 신령해진다. 소나무가 먼저 빛을 받아 버린 바람에 굴참나무는 어두움을 받아 수피가 검다.

 

300년의 위용을 자랑하는 소나무

뒷담 너머엔 벚나무, 집 주변의 호두나무와 감나무도 눈길 붙잡아

소나무들이 하늘로 향해 줄기를 솟구친다. 군데군데 상처난 줄기와 더 이상 팽창하지 않는 수관속에 잔가지의 비틀림은 더욱 세월의 연륜을 보게 한다. 신문에는 주로 겨울 설송도가 등장하는데 숲속 산책길은 사진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최고의 경치와 생동하는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상당히 굵은 소나무 사이로 집들이 보인다. 줄기는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그루터기에서도 웅장함을 느낀다. 조금 더 가면 큰 나무를 베고 난 후 생긴 2차 소나무숲이 빽빽하다. 집 가까이로 내려오면 벚나무 고목들이 서 있다. 윗줄기는 거의 무너지고 밑둥만 겨우 버티는 삶을 산다. 집 곁의 호두나무와 감나무는 집 주인이 심은 과실나무이다. 동산숲에서 집으로 내려오는 길목에는 원형공연장이 있고 깨끗한 기와집의 처마가 나란하다. 선교장 집 뒤뜰에는 돌을 예쁘게 쌓고 그 위에 배롱나무를 심었으며 초가별장이 아담하다. 앞마당에서 집뒤의 소나무를 다시 바라보니 300년 노송이 경관의 여백을 지운다.

빽빽한 2차 소나무숲

아담한 초가집과 고목들

글/사진 : 이천용 푸른아시아 기획이사·나무와숲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