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60-[푸른아시아가 만난 사람] 마리아 프란치스코수녀회 공부방 자원봉사자 박현숙씨

서울 경기대 입구 푸른아시아 사무실 앞 카페에서 만난 박현숙씨는 커피를 주문한 후 보온병을 내밀었다.
“커피는 여기에 주세요.” 종이컵에 드릴까요? 머그컵에 드릴까요? 하고 물어보려던 점원이 그 말에 깜짝 놀라는 눈치다.

환경 NGO에 몸 담고 있는 필자보다 더 친환경적 삶을 보여주는 박현숙씨를 보고 ‘말로만 듣던 자신의 텀블러에 커피 달라는 사람이 실제로 있구나’ 하는 걸 새삼 실감했다.
그를 푸른아시아가 만난 사람으로 인터뷰 하고자 했던 것은 “푸른아시아를 만나고 삶이 바뀌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환경에 대해선 긍정적이고 공감을 표시하고 동참을 하지만 인생이 바뀌었다고 하는 사람은 사실 많지 않다. ‘도대체 얼마나 삶이 바뀌었길래’ 하는 궁금증에 만나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인생의 완성기인 중년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다니…

“4년전 푸른아시아 카페콘서트 뒤풀이장이었어요. 거기서 오기출 사무총장님을 처음 만났지요. 그는 처음 만난 제게 대뜸 꿈이 뭐냐고 묻는 거예요. 아니 나이 오십 넘은 사람에게 꿈이 뭐냐니? 이게 뭐야? 싶었죠. 게다가 환경단체에서 환경이야기는 안 하고 평화를 화제로 이야기 하다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런 이야기를 하니 좀 놀랐죠.”

‘보통아줌마’ 박현숙씨는 푸른아시아를 만난 이 날이 삶의 변환점이 되었다.(날짜를 짚어보니 2011년 2월 제2회 카페콘서트였다.)

하루하루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 하며 나름 열심히 살아왔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꿈이 없었다. ‘그래 20대엔 꿈이 있었는데, 지금 내 꿈은 뭐지? 내 일상이 뭐가 잘못 되었지…’ 젊은 날부터의 삶을 되짚어 보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국어선생님을 하다가 결혼할 시기에 결혼했다. 부산에서 교사생활 10년 되던 해에 가족들의 성화에 못 이겨 남편 밥해주러 사표를 내고 남편의 직장이 있는 시골(경북 봉화, 영주)가서 연탄불 피우며 아이 둘을 키우며 살았다. 나름 열심히 산다고 생각했는데 젊은 시절의 꿈과는 점점 멀어져 가는 자신을 느끼지도 못하였다.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그의 대학시절을 기억하는 동창들은 만날 때마다 “너, 너무 변했다”고 했다. 자신은 나름 진보라고 생각하며 사는데 친구들은 세속적인 삶에 빠진 그를 안타까워 했다. 


꿈을 상기시켜준 푸른아시아, 가까운 사람들을 후원회원으로
    

그랬다. 그는 현실적으로 풍족하게 살았고 자녀들도 남들이 명문이라고 하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부족한, 꽉 채워지지 않은 그 무엇이 있었다. 그 와중에 푸른아시아를 만나 꿈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 내 꿈이 뭐였지?’

그는 먼저 지구환경, 기후변화에 대한 공감을 갖게 해준 푸른아시아를 위해 ‘뭔가’를 하기 시작했다. 만나는 친구들마다 후원가입서를 쓰게 했다. 카페콘서트에 가면 꼭 뒤풀이장까지 가서 ‘사람이야기’를 듣곤 했다. 집안사람들 형제 자매들도 후원회원으로 가입했다. 그가 하는 일에 가까운 이들이 손을 들어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들은 몽골에서 활동하는 해외자원봉사도 자원했다.

“푸른아시아는 단순히 환경만을 생각하는 단체가 아니었어요.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결국은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게 너무 공감이 되었어요.”

그는 기후변화와 사막화에 대한 공부도 하고 그러면서 점점 더 관심도 깊어졌다. 그는 평소 보온병을 2개 갖고 다닌다. 하나는 커피담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물 담는 것으로. 종이컵 하나라도 줄이겠다는 것이다. 조그마한 실천이라도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몸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한비야 씨가 쓴 글이었던 같아요. 아프리카 오지 여행 중 처음 방문했을 때만 해도 괜찮았던 사람들이 몇 년 후 다시 방문했을 때 실명한 사람들이 많더래요. 그 원인이 아마존에서 나무를 벌목한 영향이 지구 반대편까지 영향을 끼친 탓이라는 거죠. 아프리카의 일조량이 많아지고 주민들은 백내장에 걸리고 아이들은 영양실조로 실명까지 했다는 거예요. 내가 하는 작은 행동(에너지를 무심코 많이 쓰는 것)이, 지구촌 누군가의 눈을 멀게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부담되었어요.”

그는 친척들에게까지 지구의 누군가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되짚어보게 했다. 결론은 푸른아시아 회원으로 가입해 나무심기 후원을 하는 것. 최소한 할 수 있는 일부터 해보자는 것이었다. 기후변화, 사막화 얘기는 결국 인간을 위한 것이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숭고한 일인가.

국어선생님에서 보통아줌마, 다시 상처받은 청소년을 위한 자원봉사자로

따져보면 ‘보통아줌마’로 편하게 살아왔다고 해도 그의 기저에는 ‘봉사의 DNA’가 깔려 있었다. 경북에 살 때만 해도 영주시 청소년상담복지센터와 교육청상담실에서 자원봉사를 근 7~8년간이나 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문화쇼크’를 받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지냈다. 큰아들이 고등학교 1학년일 때 텝스 시험을 치러 반 친구랑 대구에 갔는데 같이 간 친구들이 터미널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한 달 동안 볼 사람을 하루만에 다 봤다고 하며 스트레스를 받아 시험을 망치고 온 적도 있었다. 그가 상담을 맡았던 청소년들은 대부분 시골에서 살면서 경제적으로 힘든 아이들이 많았다.

그랬다. 서울오기 전엔 아이들을 위한 상담도 열심히 했다.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한 글쓰기테라피. 그의 꿈은 더욱 뚜렷해졌다. 그는 국어교사 출신의 경험을 보태 소외되고 상처받은 아이들을 위한 심리상담을 하고 싶었다. 중년의 나이에 다시 꿈을 가진 그는 열정이 되살아났다.

가톨릭 신자로서 가톨릭 영성심리상담교육원에서 2년간 공부하고 영성심리상담사 자격도 얻었다. ‘1318’에서 청소년 상담도 열심히 했다.

올해는 열린사이버대학 상담심리학과에 편입을 했다. 주변에선 대학원을 가라고 했지만 대학과정에서 배울 걸 배우고 가야겠다 싶어 다시 대학에 들어가는 걸 택했다. 동기들은 2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하다. 경찰, 교도관, 물리치료사, 목사 등 직업군도 다양하다. 그들은 왜 여기에 왔을까? 이들은 하나같이 봉사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내 경험을 토대로 소외나 폭력으로 상처받은 마음을 다독거려주고자 한다. 사람은 사람으로부터 가장 큰 상처를 입지만, 사람으로부터 가장 큰 위안을 얻는다는 것을 이들은 알고 있었다.

본격적인 공부를 하면서 현장봉사도 더 적극적으로 했다. 마리아 프란치스코수녀회 공부방에서 자원봉사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수업하고 상담하는 청소년들은 조손가정 다문화가정 한부모가정의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처음엔 수업하기를 꺼리고 선생님이 안 오기를 바라던 아이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 걸 알고 저도 힐링되는 걸 느꼈어요.”

이런 자원봉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속적이고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한 두 차례 할 것 같으면 안 하는 게 낫다는 게 현장의 분위기다.

그의 꿈은 더욱 더 커지고 있다. 앞으로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사회적 기업, 또는 사회적 협동조합을 만들었으면 한다. 글쓰기테라피 뿐 아니라 미술치료, 음악치료를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 더욱 효과적인 상담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글 이동형 푸른아시아 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