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보니 남는것은 사람이더라 – 바가노르 사업장 박지영 간사

 

박지영, 바가노르 사업장 파견 간사

한국에 돌아갈 날도 이제 2주 가량이 남았다.
숨가쁘게, 혹은 너무나도 게으르게, 무의미하게, 나태하게, 민폐를 주며, 즐겁게, 또는 뜻 깊게 보낸 1년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1개월 조기귀국을 할 예정이라 11개월 파견이지만, 이렇게 길고 추운 겨울을 보내다 보니 1년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 아침 해는 8-9시가 넘어야 떠오르고, 6시도 안 되어서 태양 빛은 자취를 감춘 캄캄한 밤이 되니 훨씬 지루하고 긴 하루라는 느낌이 든다.

이번 1년은 나는 내 나름대로의 ‘어린 나이’를 조금이라도 티 내지 않기 위해서 노력한 시간이었다. 결코 공주처럼 떠받들어져 자란 건 아니지만 그 동안 집안일을 조금이라도 안 하려고 꾀를 부렸던, 그리고 스스로는 손 하나 까딱 않으려는 어린애 같은 나의 생활 태도는 몽골에, 바가노르에 와서 살게 된 지 1주일도 안 되어 금방 티가 나기 시작했다.
11개월이 거의 경과되어 귀국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까지도 스스로 평소에 돈을 얼마나 쓰는지 기록하는 습관은 들지 않았지만, 중요한 공동 생활비마저 기록을 놓쳐서 잔액 계산에 애를 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설거지와 샤워만 할 줄 알지, 세제나 바디클린저 뚜껑 닫기는 몸에 배이지 않았고, 생각 없이 놀 줄만 알았지 하루를 계획하며 사는 습관 따위는 없던 나에게 조금이라도 버겁지 않은 생활 패턴은 없었던 것 같다.

생활뿐만이 아니라 일할 때에도 나는 ‘게으른 매니저’일 때가 많았다. 돌아다니며 내 눈으로 확인해야 할 사항들을 이행하지 않은 적도 많았고, 사람들의 일한 시간 관리나 그들의 일하는 태도 관리도 종종 빼먹었다. 하기 싫어서 ‘온갖 수를 다 쓴’ 매니저였다.
또, 생각해보면 무슨 이유인지는 이젠 기억도 나지 않지만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약간의 벽을 두었던 것 같다. 왜였을까? 외국인인 나를 향한 동네 사람들의 달갑지만은 않은 놀림 비슷한 관심, 또는 차별적으로 (외국인에 대한 차별적인 태도는 어느 나라를 가도 같겠지만)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외국인인 나를 대하는 일부 사람들의 어딘가 적대적인, 또는 바보 취급하는 태도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아무리 티 내지 않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어린 나이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갑작스레 모든 게 달라진 주변 환경에 맞서 생겨난 본능적인 자기방어와 경계심 때문일까.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이런 나의 경계심은 꽤나 오래 갔던 것 같다. 부끄럽게도, 귀국 준비를 하는 지금까지도 가만 생각해보면 완전하게 마음이 열리지는 않은 것 같지만 말이다.

?4월 4일, 여전히 겨울 날씨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은, 처음 일을 시작했던 그 추운 날에 들판에서 멍하니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계속 찬 바람이 불어 오자 내가 추울까 봐 살며시 뒤로 다가와 나를 안아주던 토야 아줌마에게마저 벽을 두고 있었다. 거친 환경, 궂은 날씨에 삽과 곡괭이로 얼어있는 땅을 파고 장갑을 끼었어도 차가움이 그대로 전해지는 무거운 쇠 꼬챙이를 들고 단단하게 얼어붙은 흙덩이를 찍어내는 사람들을 위해서 난 어린 아이가 아니라 그 곳의 매니저로서 그들에게 담요라도 건네며 먼저 따뜻이 대해 주었어야 했는데, 당연하다는 듯 ‘어린 아이’로서 ‘어른’인 그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나눠주러 왔다면서 받기만 했다. 항상 뒤늦게 깨닫는 나의 바보 같음은 여전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참 미운 습관이다.

문득, 귀국 준비를 하면서 선물을 살 때에 (물론 내가 받는 모든 사랑이 한 분에게서 나오는 것이지만) 이 곳에서 너무나 나를 사랑해 주었던, 예쁜 구석도 하나 없는 나를 참 많이도 아껴 주었던 토야 아줌마, 체렝 아줌마, 통갈락 아줌마와 냠다와 아저씨, 태왕 아저씨, 초카 아저씨 어힝 아줌마… 우리 열명의 동료들과 두 경비원에게 참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가능하다면 따뜻한 양말이라도 하나씩 사 드려야겠다고, 직접 전할 수 없어도 계속 같은 동네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서라도 선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기 생각밖에 하지 않는 참 이기적인 아이에게 매일 웃어주면서, 말도 못 알아듣는 아이가 시키는 일을 하시면서, 힘든 일을 한 건 자신들인데 이거 한 번 먹어보라면서 넉넉하지도 않은 식사를 크게 뚝 떼어 주던 사람들에게, 내가 비록 잘 다루는 악기도 없어서 이 분들에게 음악을 들려드릴 수도, 음치인데다 몽골어도 잘 못 읽어서 그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해줄 수 없어도, 하루 일당을 벌기 위해 이 추운 날씨에도 일용직을 나가야 하고 집이 추워서 외투까지 모두 껴입고 자야 하는 이 분들에게 양말 하나씩 사 드릴 돈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1월 마지막 주~2월 첫 주를 에르덴 솜(Эрдэнэ Сум)에서 교육을 하고 귀국할 짐을 가지러 잠시 바가노르로 돌아 온다니까 바가노르에 오면 꼭 전화하라고 10번, 20번씩 이야기하던 아줌마들에게, 그리고 한국에 가면 꼭 전화해달라는 아줌마들에게 비록 내가 글을 쓸 줄도, 문법이 맞아서 뜻을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서 편지를 써 줄 수도 없지만, 물론 말도 잘 못해서 길어야, 정말 길어야 30초짜리의 말도 안 되는 대화가 전부겠지만 전화해서 참 감사하다고, 건강히 지내라고 꼭 이야기해주어야겠다.? 물론 잘 알아들어 주실 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또다시 문득, 에세이를 쓰다가 주변 사람들, 특히 말이 통하는, 서로의 감정이 깊게 와 닿을 수 있는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지 생각해보았다.
자기만의 공상에 빠져서 혼자 상상 속의 세계 여행, 아니 우주 여행을 하다 돌아오는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서로 이야기를 할 수록 주제는 점점 극과 극이 되어 버리는 사람이었을까. 참 게으른 사람이기도, 아주 가끔은 제 정신을 차려서 후다닥 자기 얘기를 해 버리곤 다시 공상의 세계로 떠나는 사람이기도, 속 좁아서 별 것 아닌 일에도 민감하게 구는 밴댕이 이기도, 정말 먹을 수 있을 지 의심스러운데 먹어 보면 음식 같은 음식을 만들어내는 사람이기도, 대뜸 헛소리해서 듣는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사람이기도 했을 테고, 서식지에 꿈쩍 않고 처박혀서 세월을 보내는 생물이기도, 우걱우걱 먹으면서 살찐다고 징징거리는 사람이기도, 갑자기 혼자 열 받아서 주변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사람이기도 했을 거다. 뒤돌아 생각해보니 난 참 민폐 캐릭터인 사람이었다. 계속 이런 나를 봐 오던 가족이 아닌 사람이, 사람들이 나의 이런 습관을 보며 참 많이도 경악했을 것이다. 그런 분들이 지닌 아름다운 생활 습관, 아름다운 마음을 보고 느끼며 난 참 모자라고 생각보다 참 많이 바뀌어야겠다고, 그리고 엄마 아빠가 지금까지 한숨으로 해 왔을 내 뒤치다꺼리를 생각하니 난 “인간 되려면 멀었다”라는 답을 내릴 수 있었다.

귀국이 며칠 앞으로 다가온 지금, 이미 연말도 지나고 설도 지났지만 나의 연말은 이제 다가오고 있기에 참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다.

-20℃의 날씨에 처음 도착해 30℃의 여름 날씨에서 -40℃를 왔다 갔다 하는 지금까지, 한국에서라면 산 꼭대기 높이인 약 1600m가 넘는 고지대인 이 몽골에서 무사히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내 스스로가 참 대견하다고 여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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