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경의 바양노르에서..] 오만과 편견
0207 오만과 편견
우리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는 노력과 시도는 종종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되기 십상인 것 같다. 삶과 죽음으로 규정되는 우리의 삶은 그마저도 기껏해야 100년 남짓한 기간으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파편적이나마 삶과 삶이 기록으로 연결되기 시작한 역사시대 전부를 조망한다고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우리의 상상의 틀조차도 벗어나곤 하는 우주의 시간 앞에서는, 지금 당장 우리가 과거로부터 조망한다고 하고 있는 현상이,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온 큰 변화의 물결 속에 잠시 일다 사라지고 말 변덕인지, 혹은 성가신 변주들이 배제된 큰 변화 자체의 한 부분인지 가리기가 힘들다. 어쩌면 그 ‘큰 변화의 물결’이라는 것 자체가, 그러니까 이 공간에 우리가 그토록 염원해온 ‘진리’라고 부를 만한 ‘일관적인 변화의 원리’가 실재하는지 환상일 뿐인지도 우리로서는 영영 알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지금 우리가 당연시하는 세상은 대다수가 가변적일 터이지만, 이러한 가변성은 때로는 그것을 인지하고 있는 와중에도 충격적이다. 현재의 흑해가 BP5600년 경까지는 ‘에욱시네 호수’였다는 것은, 그 변화를 겪었을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틀 자체의 붕괴였을 것이다. 그 사건은 이심율이나 기울기 같은 지구 궤도 변수들에 의해 발생한 기후의 변화로 인해 일어난 일이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확률에 의해 결정되는 모양이다. (확실히 나는 점점 ‘운명론적 세계관’과는 등을 지고 있다.)
<기후, 문명의 지도를 바꾸다>라는 책은 현재의 풍경만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과거의 모습을 그리고 묘사해내는 ‘고고학’의 매력과 함께, 나로 하여금 지금 상황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의 허구성을 짐작하게 했다. 고고학자 브라이언 페이건이 그려 보이는 1만 8천년 전부터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해온 기후라는 배경은 그가 비유하듯 ‘펌프와 컨베이어 벨트’의 작용과도 같은 끊임없는 변화를 통해 각 시기의 인류로 하여금 그들이 고정적이다 믿어오던 ‘세상’을 몇 번이고 허물어뜨렸으리라. 물론 페이건 역시 최근의 급작스런 기후 변화가 인간의 행위에 의한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다만, 그는 1만 8천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후 지속적으로 온난한 충적세의 이 이례적인 지구의 여름이, 그리고 이 여름을 틈타 생겨난 인류의 문명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변수들에 의해 언제든지 그리고 얼마든지 끝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기후의 변동에 따라 적응하기 위해 취득한 인간의 생활 양식, 즉 고대의 수렵–채집 위주의 유목 사회로부터 농경을 획득하여 현대의 집중적 도시화로의 변화가 갑작스런 기후 변동에 오히려 취약해질 수 있음을 역사적 예시를 들어 설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작은 파도를 이겨내기 위해 몸집이 커진 선박은, 그러나 대양의 거센 파도에는 영락없이 속수무책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옳고 그름을 논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저 순간순간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려는 그때그때의 근시안적인 대응일 뿐이니까. 마치 진화가 일어나는 과정처럼 말이다. 결국 그 모든 계획을 짜고 이행하는 시계공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저자는 그저 담담하게 인류 탄생 후 기후 변동에 따라 이리저리 변화해온 우리의 궤적을 논리 정연히 풀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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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특히 내 관심을 집중시켰던 부분은 사하라에 관한 것이었다. 페이건은 “마치 허파처럼” 숨을 쉬며 기후의 ‘펌프’에 따라 팽창하고 수축하는 사하라 사막의 움직임을 추적한 자료를 토대로, (당연하겠지만 놀랍게도) 사하라는 1년 사이에도 110km 수축하여 72만 4천km2의 면적을 잃어버리곤 한다고 밝혔다. 20세기 중 가장 건조했다는 1984년 전체 사막의 15%가 남쪽으로 팽창한 그 이듬해의 일이라고 한다. 의문이 생겼다. 그렇게 변동하는 사막이라면, 사막은 사막화는 어떻게 정의되어야 할까, 그리고 최근의 인간에 의한 기후변화 전의 세계에서도 자연스레 발생하는 것이라면 사막화 방지라는 슬로건은 과연 꼭 필요한 것일까. 몽골에 오기 전 사전 교육에서 오 총장님은 사막과 사막화의 차이점을 설명해주셨다. 그 나름의 소중한 역할을 맡는 사막과 달리, 인간의 영향 등으로 인해 갑작스레 건조화되는 현상이 ‘사막화’이며 그 사막화로부터 초지를 복원해내는 것이야말로 그 자신의, 그리고 우리의 목표가 아니겠냐고 말이다. 하지만 혹시 말이다. 혹시 어쩌면 지금 우리의 사막과 사막화의 정의는, 지구가 걸어온 길에 비해 턱없이 짧기만 한 문명의 경험 만에 근거한, 그러면서도 우리가 그것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우리의 오만과 편견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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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의문은 아마 앞으로도 한참 동안은 명백하고 정확한 대답을 도출해낼 수 없을 것이다. 현재 기후변화의 주요 원인에 대한 질문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우리로서는 다만 지금까지의 과학적인 자료를 통해 짐작할 뿐. 단지, 그저 개인적이고 제한적인 의미에서 누군가가 기후변화를 이해했던 방식을 도입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한 강연회에서 누군가 그런 말을 했었다. 기후변화가 산업화 이후 인간의 생활방식에 기인된 부자연스러운 변화라는, 그리고 지구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상충되는 의견들이 있지만, 그것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알 수 있는 일이 아니겠냐고. 아무리 자정 작용을 전제한다지만 우리가 불러들인 불균형이(단적으로 이산화탄소를 들 수 있다) 적정 수준을 넘었을 때의 결과, 혹은 (마이클 폴란은 태양으로부터의 빛이라는 ‘공짜 점심’을 들어 적어도 경작에 있어서는 제로섬이 아닐 수도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고 강조했지만 결국 큰 틀에서는) 소모량이 크기에 따른 고갈의 증가 등 기본적인 상식을 동원하자면, 결국 이제껏 우리가 조금 더 편하기 위한 행동들의 결과를 예상할 수 있지 않겠냐고 말이다. 우리가 배출해낸 탄소가 우리가 없었을 때와 비교하여 과연 그 동안의 지구의 호흡을 방해하지 않는 적정 수준이었을까 하는. 그는 아닌 것 같다 했고, 나는 그에 동의한다. 그리고 사막화 문제 역시 같은 맥락으로 사고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잠정적인 결론 하에서 이에 부합하는 실천으로서의 희망의 숲 조성은 설사 그 전제가 조금쯤 엇나갔다 한들 실천으로 인한 부작용의 여지는 적고 선작용의 여지는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지난 1년간 때로는 벅차게 때로는 버겁게 진행한 조림 사업이 헛되지 않는 일이라 믿는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직간접적인 방법으로 계속 나무를 심고 가꾸고 싶다.
그래, 어쩌면 정말 오만과 편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만이나 편견이라는 결함이 있는 틀을 사용할지언정 대상을 이해하고자 아무런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무관심이고 방관이 아닐까. 다아시와 엘리자베스는 비록 각자의 오만과 편견으로 서로에 대한 오해로 관계를 시작하지만, 결국 오해를 풀고 행복한 결말을 이끌어냈다. 우리와 자연도 시작이 조금 엉켰다 하여 크게 문제될 일은 없다. 서로에 대한 관심만 있다면 앞으로 서로에 대해 알아가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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