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경의 바양노르에서..] 여유 그리고 웃음

위기에 대처하는 법, 여유 그리고 웃음

 

2010.06.01

 

권력이라는 개념은 모든 사회에서 적용된다. 그 사회가 작건 크건, 개인적인 친목이 목적인 사회건 공익의 달성이 목표인 사회건, 기본적으로 그 관계에 역동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권력이다.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는 데 권력은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을뿐더러 그 권력이라는 것은 한 사회에 있어 자신의 입지와 직결되기에, 그 권력에 초연할 수 있는 는 아마도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에 일반적인 의미의 사람이다.) 사람의, 아니 생명체의 본성을 혹은 생명의 추구라고 본다면, 이러한 이기성을 일면 당연하고도 타당하다. 어쨌거나 사람은 삶을 살기에 사람이고, 생명체는 생명을 갖고 있기에 생명체인 것이다.

 

바양노르 사업장 또한 이러한 시각에서 보자면 끊임없이 알력 다툼이 일어나는 하나의 사회이다. 몽골 서민들의 경제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특히나 이곳에서의 이러한 권력 다툼은 (우리 한국인들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이들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얻으려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일면 안쓰러운 성질의 것이기도 하다. 푸른 아시아 사업의 장점은 국제적 화두인 (추상적인) 환경적 문제 인식을, 지역적 혹은 가족적인 수준에서 경제적인 (그래서 실질적이고도 구체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시도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곳에서 내가 우리가 겪고 있는 이곳 주민들과의 크고 작은 갈등들은 그렇다면 그러한 푸른 아시아의 이상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겪어내야 하는 과제인 셈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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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몇 차례의 위기가 있었다. 그 진원지는 아마도 그간 형성되어온 이 사회의 암묵적인 틀을 유지하려는 (혹은 그것보다 더 나은 처우를 받고자 하는) 이곳 주민들과, 그것을 변화시키려는 (혹은 가끔은 그것과 배치되는 원칙을 관철시키려는) 이방인인 우리의 입장 차이일 테고, 이를 가장 단순화한다면 이러한 두 입장 간의 알력 다툼쯤 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러한 다툼이 나이 어린,’ ‘여자,’ ‘이방인이라는 권력에 있어서의 악조건을 두루 갖춘 본인에게로 구체화될 때면 정말 하고 뒤통수를 맞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름대로 이러한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음 알음 체득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곳 주민들과의 충분한 라포 형성에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이다. 

 

조림사업의 핵심인 관수 작업을 위해서는, 전날 밤 저수조에 물을 받아놓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저수조에 물이 있어야 다음 날 양동이로 그 물을 길어 나무까지 배달할 수 있으니까. 바양노르에서는 그 동안 이 야간 작업을 각 주민들이 순차적으로 돌아가면서 진행했던 모양이었다. 타 사업장에서는 야간 저수조 물받기 작업이 경비원의 임무 중 하나였던 지라, 관수 작업이 진행되면서 우리는 올해 최초 저수조 작업을 경비원에게 맡겨 보았다. 한 달의 생계비가 급여보다 클 이곳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우리의 조처가 보장받았던 수당의 일부를 위협하는 일종의 위기였던 까닭에 이런 저런 불만의 말들이 많았다. 하지만 개인 개인들의 불만은 으레 그렇듯 그저 장난 섞인 푸념 수준에 그친다. 푸념이 불만이 되는 것은 개인 개인들이 모였을 때다. 유감스럽게도 그 순간은 두 팀을 데리고 혼자 신 조림장에서 작업 지시를 내려야 했던 어느 아침이었다. 아주 심각하게 표면화된 것은 아니었으나 주민들의 불만은 반쯤 경직된 분위기로 드러났고, 그런 주민들의 반응에 십중팔구 영향을 받았을 경비원은 야간 저수조 작업의 추가 급여를 반 농담조로 요구했다. 주민들은 그러한 경비원의 이야기에 동조의 말들을 얹었다. 순간 뜻밖의 상황에 잠시 당황했던 나는 전 날 지 간사님에게 받았던 사탕을 기억해내 주머니를 뒤적여 찾아 들고서 장난 섞인 얼굴로 조카 아저씨 앞에 건넸다. ‘아하~ 쪼 먕가 치헤르 아와레’ (번역하자면 아저씨~ 만 원짜리 사탕 드릴게요쯤 된다) 라는 말과 함께. 순간, 분위기는 눈 녹듯 풀어졌고 두 귀로 사람들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먼저 사람들의 마음을 푸는 데 성공하면, 불만 사항에 대해 소통하는 것은 한결 수월해진다. 비싼 사탕이라며 한바탕 너스레를 떤 후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 함께 이야기할 기회를 갖자고 답했다. 몇 차례의 여진이 남아 있긴 했지만 어쨌거나 야간 저수조 작업에 관한 이야기는 현재 나름의 합의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가 하면, 얼마 전에는 다와수릉 아주머니가 나름의 장난 섞인 도전을 해왔다. 우리 조림장 저 편으로 한국인이 유실수 농장을 차렸는데 조림 작업에 익숙해진 우리 근로자에게 푸른 아시아보다 더 높은 급여를 약속했다면서, 그간 우리가 수용을 거부했던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지 않으면 그리로 가겠다며 장난을 걸어왔던 것이다. 처음 몇 번은 지 간사님도 나도, 함께 장난을 치며 그렇다면 같이 가자고 대꾸하곤 했는데, 이것이 반복되면서 야간 작업 인원이라던지 작업 인원 보충과 같은 건들에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키려는 사람들의 의도가 짙어지자 우리도 조금쯤 난처해졌다. 조금쯤 기분이 상한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온 이방인들을 찔러보려는 의도가 다분했던 것이다. 다싱칠링 솜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 작업장을 떠나는 볼로로 아주머니의 환송회 날에도, 사람들은 그 유실수 농장 이야기를 꺼내며 우리를 어떻게든 놀리려 들었다. 잔이 없어 패트병을 잘라 컵을 만들어 부족한 맥주를 나누어 돌리던 그 날 저녁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도 한 편으로는 그런 불편한 밀고 당기기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며 웃고 떠들던 와중에 작사 아주머니가 내게 맥주를 권했다. 쭉 들이키라면서. 넉살 좋게 얼른 넙죽 잔을 받은 나는 옆에 있던 다와 수릉 아주머니 이하 사람들을 보며 이 잔을 다 마시면 다시는 저 쪽 유실수 농장 이야기를 하지 않을 거냐 물었다. 그랬더니 눈치 빠른 사랑 치맥 아주머니는 나에게 이곳에 남는 사람들을 위하여쯤 되었을 몽골어를 가르쳐준다. 그 말을 그대로 따라하며 애교스럽게 건배 제의를 한 나는 맥주 한 잔을 냉큼 비웠고,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그런 나에게 환호해주었다. 저 쪽 농장으로 절대 가지 않겠다 약속하면서. 그리고 난 지 며칠 후, 다와수릉 아주머니가 다시 한국인 유실수 농장 이야기를 꺼내며 자신들에 후하게 대우해줄 것을 요구했던 것은 작업 중 쉬는 시간이었다. 옳거니 했던 나는, 아주머니의 팔짱을 끼고서 지난 맥주 사건 이야기를 꺼냈다. 장난 섞인 표정으로 지난 아주머니의 약속을 들먹이며 호들라 모~ ~’ (거짓말 나빠~나빠 쯤 된다) 라며 떠드는 내 앞에서 아주머니는 조금쯤 당황한 얼굴로 알았다며 누그러진 미소를 지었고, 함께 쉬고 있던 사람들도 덩달아 웃었다. 그 이후, 나는 더 이상 다와수릉 아주머니가 유실수 농장을 들먹거리며 장난 섞인 협박을 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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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런 장난스런 대응이 능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확실히 잘잘못을 짚고 따지는 과정이 따라주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 사람들의 마음이 누그러지고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지면 서로의 입장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기가 훨씬 쉬워지는 것은 아마도 십중팔구 사실이다. 웃음으로 넘기는 것은 물론 임기 응변이기는 하지만 후속 조치가 큰 진통 없이 진행될 수 있게 하는 윤활유가 되곤 한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장난 섞인 말들에도 를 숨겨놓을 수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적으로 웃음거리가 된다거나 하는 비교적 큰 심리적 고통을 겪게 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행동의 옳지 않은 점에 뜨끔하게 만들 수 있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언젠가 언급했듯 방어 심리는 소통을 방해하는 제 일의 요소이다. 방어 심리를 완충하는 것만으로도 그 나름의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닐까.

 

, 이 임기 응변에는 필수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여유이다. 아차 하는 순간에 당황이라는 녀석에 잡아 먹혀 버린다면 응변은커녕 오히려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짓궂은 장난이 잦은 이 몽골 사람들 틈에서 그들의 장난에 수치심이나 심리적 위협을 느끼게 된다면 이들 앞에서 작으나마 지도자로서 설 수 있는 자리가 작아질 테니까. 어쩌면 이 역시도 권력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심리적 싸움이랄까. 하지만, 아직 많이 부족함에도 본인이 이들의 장난에 심리적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그들의 속셈을 달가워하지는 않지만 그 나름의 이유를 일부나마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한편으로 작업 시간의 문제에, 혹은 급여의 문제에 그렇게 민감할 수 밖에 없는 이 곳의 상황을 수용한다면 심리적 여유를 유지하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우리 과의 어느 교수님은 마지막 강의에서 문학은 타인에 대한 공감이라 하셨다. 타인을 공감함으로써 더욱 다양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기에 문학의 힘이 있는 것이라고. ‘공감은 비단 문학에만 힘을 발휘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나에게는 분명 이들을 움직일 권력이 필요하다. 이들 역시 나를 움직일 권력이 필요할 것이다. 다만, 그 권력 다툼이 항상 다툼이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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