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경의 바양노르에서..] 예외..

원칙, 그리고 예외

 

2010.5.30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는 그 모든 원칙과 법칙에는 소위 예외가 있다. 물론, 중학교 수업에 으레 등장하는 귀납법의 예시인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법칙을 (적어도 아직까지는) 제외하고는 말이다.

 

현대서양문학이란 강의에 빠져있던 작년 즈음, 나는 상대주의에 대해 즉 일반화하자면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쯤 될 상대주의의 정체성의 아이러닉함에 대해 한참 고민하곤 했다. 교수님은 오스카 와일드의 냉소를 예시로 하는 엄격한 사회구조가 특징인 빅토리안 시대를 그리고 그에 반항해 비일관적인 의식의 흐름이나 내용이 아닌 스타일 자체에 강조점을 두는 모더니즘의 (일종의) 본질주의를 거쳐 다다른 것이 초월주의라고 현대 영문학사를 훑어내시면서, 근대의 본질주의라는 허무주의등을 포함하는 초월주의를 거쳐 상대주의라고 하는 으로 이어졌고 최근에 들어서는 그 간의 통합 혹은 타협에 해당하는 의 양상을 보이는 것 같지 않냐는 변증법적 물음을 던지셨다. 강의가 끝나갈 무렵, 나는 그렇다면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는 명제는 그 조차 상대적일 가능성을 내포함으로써 치명적인 약점을, 동시에 가장 큰 강점을 갖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어쨌거나 (다행이건 불행이건) 세상은 하나의 시각으로 단순히 설명될 수 없으며, 따라서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이 뒤엉킨 그래서 그 모든 가능성을 포함하는 상대주의야 말로 가장 근접하게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또 한번 허공에 뜬 상념들의 결론을 내어놓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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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럽게 내 머리 속을 휘저었던 과거의 고민들이 떠오른 이유는 아마도 푸른 아시아의 현장이 나를 절대성상대성사이에서 정신 없이 헷갈리게 만드는 탓이다. 단적인 예는 문화적 상대주의. 오전 오후로 출결 사항을 점검해야 하는 입장으로서는 서른 명이나 되는 사람을 일일이 호명하는 일이 조금쯤 번거로운 지라 종종 둘 넷 여섯 여덟…’ 하고서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흥얼거리는 일이 잦았다. 그러한 리듬과 멜로디가 우스웠는지 사람들은 종종 그런 나의 흥얼거림을 따라 하곤 했는데 그러한 행동이 자칫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었음을 안 것은 지난 일요일이 되어서야 였다. 오축(몽골의 주요 가축으로 양, 염소, , , 낙타. 참고로 인구가 이백칠십만 정도인 이 나라에서는 가축이 인구의 칠십 배는 된다)의 유목이 주요 산업을 이루는 몽골에서는 가축들이나 숫자를 세지,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세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조금쯤 당황한 나는 얼른 한국의 문화를 설명하며 사과를 했지만 다행히도 그 간의 나의 행동이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산 넘어 산이라는 말은 그 날의 일요일에도 적용이 되리라. 그렇게 작은 고비를 넘기자마자 작사 아주머니가 모자를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내게 꾸지람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머리에 쓰는 모자를 함부로 바닥에 널부러 놓으면 몸이 아프게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언젠가 그의 모자 위를 지나치다 모래를 뿌렸을 때 그의 갑작스런 반응이 떠오르면서 교육 때 자르갈 선생님이 해주셨던 말이 생각났다. 몽골 사람들은 모자를 중요히 여긴다고, 인사를 할 때도 모자를 벗지 않는 것이 예의이고, 게르에서 모자는 항상 탁자 위나 옷걸이에 두어야 한다고. 나는 한국 사람이니 모자를 땅에 둬도 아프지 않을 것이라는 나의 장난스런 반응에 사람들은 내가 몽골에 있으니 몽골 식대로 될 거라고, 모자를 항상 소중히 하라고 대꾸했다. 두 반응 중 상대주의인 것은 어느 쪽일까? 그렇다면 절대주의인 쪽은? 밤을 무서워하는 샤머니즘 적인 경향이 있는 이들은 야간 저수조 받기 작업을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다고 재차 강조하곤 했다. 귀신이 나타나면 십자가를 그리면 된다는 윤 간사님의 장난 어린 대답에 이들은 라마 불교식 기도 동작을 보이며 이곳은 몽골이라 답했다. 고등학교 사회문화 시간에 종종 등장하던 문화적 상대주의는 이곳에서 종종 내 머리를 식히는 재미난 고민 거리가 되곤 한다. 문화의 상대성을 인정해야한다, 하지만 식인과 같은 극단적인 문화마저도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인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라고 말씀하셨던 선생님의 명료한 말씀이 해답이 되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책 속의 해답은 쉬운 법이다. 현실은 예외라는 복병을 숨겨두니까.

 

원칙에 예외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즉 원칙에서의 상대주의는 정말 골칫거리이다. 예외란 일면 필수불가결한 녀석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일반화되어서는 절대 아니 될, 말하자면 있어서도 없어서도 안 될 어정쩡한 녀석인 셈인데, 우리 사업장에 이 불편한 손님을 또 한 번 초대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스스로 결론을 내린 탓이다. 알탄졸(번역하면 튤립이라는 이름이다)이라는 아주머니가 갑작스런 병고로 작업이 불가능해진 탓에 그 남편이 대신 출근을 하기로 한 것은 지난 번의 일이었다. 나쁜 일은 겹친다더니 이번에는 아주머니의 아이가 큰 트럭에 치이는 교통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딱한 상황을 설명하며 병원비가 필요한 그 부부를 대신해 그 동생이 작업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해왔다. 일단은 원칙을 주지시키며 보류. 그리고서 지 간사님과 의논을 청했다. 이번 역시 예외 조항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내 의견에 지 간사님은 내가 지나치게 사람들의 일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아니냐 물었다. 일단은 서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잠시 휴지. 그다지 감정적인 결론은 아니었다고 스스로는 판단했지만 일면 그렇지 않은 것만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대체 근무 불가라는 원칙이 무엇을 위한 원칙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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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일을 하기 위해 가족을 보내고 친구를 보내는 일이 파다한 몽골 식 작업 풍습을 수용한다면 책임 소지가 불분명해짐으로써 사업장에서 진행되는 일들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리라. 물론 모든 원칙에 예외가 있듯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닥친 이들에 대한 배려가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허나, 경제 사정이 딱함을 이유로 한두 번의 예외를 허용한다면 대다수가 저소득층인 우리 근로자들에게 함께 세운 원칙이 빈 껍데기가 될 수 있다. 약속은 기본적으로는 존중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다. 이는 그 내용적인 측면에서 그렇기도 하지만, 모든 사람이 합의한 것이기에 그 자체로도 그러하다. 거기다 푸른 아시아의 사업은 주민의 소득 창출 사업이기는 하지만 자선 사업은 아닌 까닭이다. 그렇지만, 근로자의 대다수를 고용한 기준이 특정 능력이나 기술이 아닌 만큼, 한국 사회에서도 아르바이트 등에서는 대리 작업이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예외로 허용하는 일이 그렇게 불합리한 것만도 아니다. 무엇보다 이들의 관습이니까. 문화적 상대주의로 접근하자면, 이 역시 존중되어야 할 성질의 것인지 모른다. 교과서 내의 시험 문제가 아닌 이상 하나의 정답은 없는 법이고 따라서 협의와 소통이 중요하다면, 양 극단의 오답이 아닌 이상 책임자 혹은 당사자들의 협의가 최우선이 아닐까.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 지 간사님은 그렇다면 주민 회의를 소집하여 그들의 의견을 묻고 합의가 된다면 이번 일은 예외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시키는 것이 어떠냐는 견해를 비치셨고 이는 나의 동의를 거쳐 합의가 되었다. 합의는 주민들과의 협의를 거쳐 우리 모두의 합의가 되었다. 이번 일을 핑계로 알탄졸 아주머니는 되면서 왜 자신은 안되냐는 식의 불평은 없는 것을 전제로 말이다. 이러한 우리의 손짓 발짓에 분명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지 않겠노라 약속했다. 하지만, 협의를 거쳤다 한들 원칙의 선을 잡고 끊는 것은 여전히 우리들의 몫인 모양이다. 얼마 전 발을 다친 바트히쉭 아주머니가 자기 대신 아들이 작업을 하면 안되냐며 슬그머니 질문을 했다. 우리는 단단히 발이 아파서 쉬는 것은 가능하지만, 대리 작업은 하지 않기로 약속하지 않았느냐 되물었다. 모두의 합의라는 어려운 과정을 거쳤다 하더라도, 개개인의 일회적 편익을 위해 약속은 이렇게도 종종 시험당하곤 한다.

 

예외 없는 원칙은 없을 테고 원칙 없는 예외도 없을 테지만, 원칙과 예외가 공존해야 하는 세상은 어지럽기 짝이 없다. 정말이지 모든 것은 문맥과 상황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다. 심지어는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는 명제조차 상황에 따라 상대적이다. 어쨌거나 원칙도 예외도 고수해야 하는 우리로써는 일관성만을 내세울 수도 그렇다고 비일관성을 남용할 수도 없다니,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 상황에 따라 쉬운 일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김 과장님께서 우리 사업장을 찾으셨다. 함박 웃음으로 차에서 내리신 과장님은 곧바로 따뜻한 포옹을 선물하셨고,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오셔선 주섬주섬 내어 보이시는가 하면, 항우와 유방 이야기를 비롯한 재미있는 말씀들을 툭툭 던지시며 많은 도움을 주셨다. 그 중에서도 몽골에서는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다는 말씀은 과장님이 가신 후에도 종종 나를 통해 회자되곤 한다. 우리의 기준과 잣대가 무용지물이 되어버릴 만큼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출몰하는 몽골이라는 나라에서 사업을 진행하는 까다로움, 동시에 아이러닉하게도 그 이면으로 숨겨진 가능성을 집어주신 것이리라. 하지만 원칙과 예외의 문제의 관점에서 보자면, 상대주의의 정수를 보여주는 말씀인 것 같기도 하다.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는 나라가 몽골이라면, 애초에 이곳에서 원칙과 예외를 고민하는 것 자체가 머리 아픈 일일 테니까. 그렇다면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는 몽골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최선을 다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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