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경의 바양노르에서..] 배타성..
0515 배타성
“>
작년 수강했던 학습심리라는 강의의 교수님은 진화를 ‘학습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제’라고 설명했다. 덕분에 한동안 ‘진화’는 나에게 일종의 화두였는데, 꽤나 흥미로웠던 명제 중 하나는 ‘고통’조차 삶을 보전하기 위해 진화된 것이라는 견해였다. ‘고통’이라는 것은 으레 인간에게 회피본능을 갖게 하는 것임에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의 순환 고리 속에서 나는 그 명제에 꽤나 공감하게 되었다. 어쨌거나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신체의 일부가, 혹은 (소위 데카르트를 비롯한 전통적인 서양 사상가들의 이원론을 굳이 수용해 이것과 분리하자면) 정신의 일부가 영영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도록 지각조차 할 수 없을 지 모르니까.
갑작스럽게 내가 고통의 존재 이유에 대해 주저리 주저리 읊어대게 된 데는 사람의 배타성 역시 생존에 필요악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배타성이야말로 소위 인간의 특성이라고 하는 ‘사회성’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한 공동체가 그 힘을 갖기 위해서, 즉 내부적으로 단단히 결속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적이 필요한 법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도 또한 그것과는 다른 상황에서도 종종 스스로를 어정쩡한 이방인처럼 느끼곤 한다. 다른 상황에 열려 있고자 하면 현재의 상황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할 테고, 현재의 상황에 완벽히 충실하고자 하면 다른 상황에 온전히 개방적일 수 없을니까, 그렇다면 나 자신조차 3자화 시켜버리곤 하는 나의 습관은 현재의 상황에 온전히 충실하는 것도 혹은 다른 상황에 완전히 개방하는 것도 거부하는, 개방성과 배타성 사이에서 나름의 균형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는 이러한 나의 버릇이 나에게 일종의 부적응을 유도하는 것은 아닐까 했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것 역시 또 하나의 동전의 양면인 모양이다.
새로운 파견 간사가 들어와 함께 일을 한 지 1주일.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까지의 진통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고, 나에게 처음 현장에 내려와서 지난 2년간 이들을 지배했던 암묵적인 분위기가 그러했듯, 지난 1달 간 형성된 우리와 몽골 주민들의 관계는 새로 적응해야 할 간사님에게 넘어야 할 하나의 산이 될 것이다. 물론, 그 적응이라는 것이 일방적인 것은 아니기에 변화를 겪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일종의 불편함을 겪어야 할 테지만, 새로운 이의 불편함에는 ‘배타성’이라는 그다지 녹록지 않은 부록이 끼어있으니까 더더욱 말이다. 더구나 그 ‘배타성’이라는 부분은 함께 보낸 시간 이외에도 문화적인 그것까지도 포함하는 모양이라, 한국에서 가벼운 장난 정도로 여겨지는 혀를 내미는 행동이 이곳에서는 꽤나 모욕적으로 받아들여진다거나 하는 소소한 차이들이 그 배타성을 부추기며 관계 형성을 방해하는 크고 작은 장애물이 된다.
주민들이 문득 문득 내어놓는 배타적인 행동들을 지켜보면서 나에게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다. 그러한 그들의 행동이 일면으로 미성숙한 비개방성을 드러내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졌지만, 또 한편으로 그러한 주민들의 배타적인 분위기는 그간 그들과 우리의 관계가 꽤나 돈독해졌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더욱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나 역시도 배타성이라는 현실과 개방성이라는 이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이 모든 배타의 불편함은 시간이 지나가면 (대부분) 자연스레 옅어지며 개방될 것이고 이 새로운 개방은 또 다른 배타를 낳을 것이다. 그렇기에 진정한 개방성은 어쩌면 배타성까지도 수용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회피의 대상임에는 분명하지만 고통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 아님을 인정한 후에 그것을 대하는 태도가 변화될 수 있다면, 배타성 역시 그럴 것이다. 배타성 역시 일정 부분 생존에 유용한 기제로서 진화되어왔는지도 모를 일이니까. 모두가 성인 군자가 되어 고통이나 배타성을 자유자제로 통제할 수 있고 생존 자체에 초탈할 수 있는 것은 아닐 테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배타성이 적어도 가책을 느껴야 할 대상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동시에 그것 자체가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도 자신의 현실에 새로 편입해오는 이에게도 조금 더 예의를 지킬 수 있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