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경의 바양노르에서..] 변화..
바양노르 0505 변화..
이곳에서의 나의 그리고 우리의 임무에 대해 고민을 할 때면 가끔, 내가 그리고 우리가 이곳에 불러들일 변화가 무섭게 느껴지곤 한다. 첫째로, 그 ‘변화’라는 것이 소위 현재 ‘잘 사는 나라’의 잣대와 기준을 무작정 들이대어 ‘너희가 잘 살기 위해선 우리처럼 살아야 한다’는 강요인 것은 아닐까. 둘째로, 작업의 능률 향상을 위해 혹은 현재의 상황에서 발전이라 생각하여 무심코 도입한 새로운 시도들이 우리가 생각지 못한 많은 부작용들을 낳게 되는 것은 아닐까. 셋째로, 그렇다면 그러한 변화가 과연 이들이 원하는, 그리고 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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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적인 예로, 현재 바양노르 사업장에서는 조림 사업을 보다 효과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여러가지 새로운 시도들을 하고 있는데, 가령 팀제를 운영하면서 중간 지도자를 양성한다거나 팀 별로 점수제를 도입하여 나름으로 사회주의의 공동체 중심적 사고와 타협한 자본주의식 동기 부여를 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점수제로 말하자면, 작업장에서의 기본 규칙들을 중심으로 점수의 가감이 있고 간혹 전체 팀이 구덩이 파기 작업 등의 단순 작업을 할 때는 가장 많이 판 팀에게 점수를 부여하는 것이 그 합의된 룰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팀 별 경쟁을 유도할 때면 이곳 사람들은 양가적인 반응을 보이곤 한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한 편으로 자신들의 성취에 따른 보상에 대해 기대치가 있으면서도 동시에 서로간의 경쟁을 통해 우열을 겨룬다는 것에 다른 한 편으로 부담감과 거리낌을 드러내 보이곤 한다. 그들의 그러한 반응은 일면 모든 사람들에 해당되는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개인적으로는 기존에 사회주의적 배경을 살아온 이들 몽골인들에게 그러한 자본주의적 보상이라는 개념이 상대적으로 강한 거부감을 주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작년, 작업 성취도가 뛰어난 사람에게 상을 주려 하자 주민들이 그것을 모두가 똑같이 나누어 갖기를 원하여 결국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적이 있다. 아무래도 한국과 몽골이라는 두 문화가 만나야 하는 국제 사업에서는 그 문화간에 간극이 생기기 마련일 테지만, 조금 거창하게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나무를 심는 사업은 사막화 방지라는 대의 아래 (의도했건 그렇지 않았건) 이들 몽골인들에게 한국적 (혹은 한국이 따르고자 하는) 가치관 자체를 유입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것도 같다. 물론, 그것은 일방적인 것이라기 보다 몽골적 그것과 타협을 거친 것이 되겠지만 말이다.
몽골에 들어오기 전 받았던 교육에서 천 국장님은 가능태와 능동태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국제 사업을 가능태를 능동태로 바꾸는 작업이라고 본다면, 그곳에서 우리의 역할은 그저 그러한 변화가 가능한 환경적 조건을 갖추어주는 것이라 설명하셨던가.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도 따라서 변화의 주체도 몽골 사람들이기에 보조자인 우리의 역할에 대해 너무 크게 부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고자 하셨던 것이라고 나는 기억한다.
천국장님의 말씀과 연장선상에서, 처음의 물음에 나의 식대로 변형된 대답을 내어놓자면 나는 우리 푸른 아시아의 몽골 사업이 결코 몽골에 일방적인 변화를 주도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혹은 그랬으면 하고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금 달리 말하자면, 나의 생각의 틀에서 가장 이상적인 국제 개발 사업은 ‘주도국’의 가치관이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변화할 것을 제안하는 방식이다. 일종의 시도와 피드백이랄까. 굳이 부연하자면, 한국 사람인 우리가 몽골 사람들에게 이런 것은 어떨까 제안을 하고 몽골 사람들은 그러한 제안을 열린 마음으로 점검하여 피드백을 하는, 또는 현재의 변화의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에 대해 답하는 형식쯤 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러한 변화의 주체는 일국이 아닌 양국일 터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간의 접촉을 통한 변화가 어떤 결과를 불러낼 것인지를 추측하는 것에는 근본적인 무리가 있다. 이는 모든 행동에 적용되는 명제인 것이다. 애당초 사람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고, 구더기가 무섭다면 장을 담글 수가 없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상호간에 합의에 의해 추진된 변화라면 그것이 어마어마한 부작용을 낳으리라고는 볼 수 없지 않을까. 혹은, 강자와 약자 모두의 입장이 고려된 변화가 무시무시한 악영향을 낳는다면, 그것은 애당초 우리의 손을 떠난 문제가 아닐까.
결국 언젠가도 언급했듯 ‘변화’는 곧 ‘삶’이다. 리차드 도킨스의 개념을 빌리자면, 가장 생물학적으로는 ‘진화’ 쯤 될 것이고, 사회 심리학적으로는 ‘적응’이라는 언어로 구체화될 수 있을까. 좀 더 거시적으로는 이러한 변화가 진행되는 것이 바로 ‘역사’인 셈이다. 첫번째 두번째 물음이 이런 식으로 풀린다면 마지막 물음이야 너무나 당연하게 ‘그렇다’일 수 밖에..
몽골의 조림장은 실상 많은 한국인들이 방문한다. 그리고 종종 나무를 심는 작업을 몽골 현지인들과 함께 하곤 한다. 좋은 마음으로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을 보며 충만해지곤 하는 감사의 마음이 가끔 감해지는 것은 일부 방문객들에게서 ‘몽골의 변화를 한국인이 주도한다’는 생각을 (본의 아니게) 엿보게 될 때이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한 행동으로 표출이 되는 법이다. 나무를 심는 작업이 가장 기본적으로는 사막화에 대한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그것은 한국과 몽골 양국 모두의 이익과 관련된 것이고, 이제 꽤나 잘 살게 된 한국이라는 나라의 국제 개발 사업이라는 점에서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 모두의 변화를 제안하는 것일 테다. 결코 우리가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닌 셈이다. 변화해야 하는 것은 나인 동시에 너이고, 이러한 변화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 나무를 통해 사람을 심는 일, 이러한 일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기본적인 예의와 예절이 전제되어야 함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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