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경의 바양노르에서..] 국제 협력 사업이 어려운 이유..
4월 17일
국제 협력 사업이 어려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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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와 ‘사랑하다’, ‘live’와 ‘love’. 언젠가 누군가 사는 것이 곧 사랑하는 것이란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우리 나라 말도, 영어도, 그리고 독일어와 몇 몇 나라들의 언어에서 ‘사랑하다’는 말과 ‘살다’는 말이 참 유사하다면서 말이다. 그는 숨을 쉬는 것, 호흡하는 것이 곧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그가 이야기했던 그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살아가는 것’이 다른 각도에서는 ‘협력하는 것’쯤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요즘 생각한다. 결국 사랑하는 일도 살아가는 일도 혼자서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니까. 넓게 보자면, 모든 살아가는 일이 협력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요즘 아주 치열하게 ‘살고’ 있다. 어떤 일이 그렇지 않겠느냐 만은 몽골에서 나무를 심는 일은 유독 협력이 없이는 아무 것도 불가능한, 그래서 협력을 이루어내는 과정 그 자체가 목적인 그야말로 국제협력사업이다. 작게는 당장 바양노르 사업장으로 파견되어 한 집에서 한솥밥을 먹고 있는 네 명의 한국인들의 협력이 기본이 될 것이고, 조림장에서 조림 사업에 동참하는 주민들과 우리 파견단 간, 심지어는 그 주민들 내부에서도 각각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또한 현지 학교나 솜청 등의 기관들, 지부의 몽골 현지 간사들, 바가노르나 에르덴 바양노르 성긴 등 다른 사업장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 여름부터 쏟아져 들어올 에코 투어팀, 한국 본부 직원들, 거기다 푸른 아시아라는 단체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기업들과 NGO 이 모든 이들이 복잡한 협력 관계도를 그려내는 인자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 속에서 끊임없는 역동을 일으키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차이’이다.
그러한 차이에야말로 삶의 미학이 있다던 누군가의 철학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종류의 인간이지만, 동시에 나는 가끔씩 정말이지 그러한 차이에 넌더리가 나곤 한다. 그것이 생각이 되었건, 관점이 되었건, 성격이 되었건, 이해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나와 다른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리고 그러한 차이에 대한 아무런 소통의 여지가 없을 때. 내가 보기에 몽골 사막화 방지 사업의 가장 어려운 부분은 몽골과의 문화적 차이이다. 국제협력사업은 일반적인 수준에서 희로애락을 불러일으키는 개인적 차이를 넘어서는 문화적 차이가 개입되는 종류의 일인 까닭이다.
윤 국장님께서 언젠가 짚어주셨던 뉘앙스의 문제 역시 그러한 ‘문화적 차이’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소통을 한다는 것은 일면 외줄을 타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일이다. 언제 어느 곳에서 오해가 생길 지 예측조차 할 수 없고, 심지어 그러한 오해의 여지를 생각지 못한 경우 꽤나 큰 문제가 발생하기 십상이다. 아주 사소하면서도 아주 위험한, 그리고 가끔씩은 모두에게 웃음을 선사하기도 하는 이 애물단지 덕분에 몽골 현지 간사님들과 한국어로 대화를 할 때에도, 짧은 몽골어로 현지인들과 대화를 할 때에도 방심은 금물이다. 그러고 보면 “진심은 통한다”는 명제는 참으로 순진한, 지나친 낙천이다.
최근 며칠 동안, 고 3때 종종 앓곤 했던 장염의 조짐이 찾아왔었다. 일반화하자면 협력을 이루어가는 과정 속의 관계 역동의 일부쯤 될 수 있었겠으나, 언제나 그렇듯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수준에서는 으레 그러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상황 판단 외의 것들이 일어나는 법이다. 나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특정 협력 대상’의 (개인적인 성격의 차이 때문인지 문화적 차이인지 현재로선 알 수 없는) 행동이 그 원인이었고, 술자리에서의 한풀이를 통해서 지금은 꽤나 풀려진 상태이지만 이런 저런 논리적인 상황 판단과 이해는 차치하고 감정적으로 한동안 꽤나 고생한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 변화의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지만, 그렇다면 내가 취할 수 있는 마지막 대안은 나 스스로의 변화일 수 밖에. 나의 개념의 틀 속에서 그러한 행동들은 사람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예의에 벗어나는 것이지만, 이런 저런 다른 틀 속에는 다를 수 있다는 가능성 정도는 열어두는 것이 현재로서는 차선이다. (나의 개념 속에서 최선은 일방적인 것이 아닌, 소통에 의한 쌍방 모두의 변화이다.)
윤 국장님은 갈등 없는 평화가 어떻게 있을 수 있냐 물으셨지만, 갈등 없이도 평화는 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갈등이 없다면 그 평화엔 아무런 재미도 기쁨도 없을 것이라고도 생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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