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경의 바양노르에서..] 몽골 문화 – 유목민의 공간, 게르

3 11일 목요일

 

유목민의 공간, 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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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족이었던 몽골인들은 게르에 살았다. 동그란 모양의 텐트 정도라고 하면 개략적인 그림은 전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창살을 뼈대 삼아 그 위로 가죽천을 단단히 덮고 돌을 매달아 거센 바람에 버티고 선 게르를 보고 있자면, 혹은 나지막한 출입구 속에서 외부와 극적으로 차이가 나는 온기에 손을 녹이며 사탕과 몽골 바우 (몽골 설날인 차강 사르에 내어놓는 일종의 빵), 그리고 수태체(우유차)를 대접받고 있노라면 텐트라는 설명이 머쓱해 지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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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게르에 모든 가족들이 함께 살아 개인 공간이 전혀 없는 몽골인들에게 개방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마치 남극 탐험이나 하듯 발목에서 무릎을 넘나드는 눈 속을 한 시간쯤 걸어 퇴근 도장을 찍기 위해 들른 담딘 후 아저씨네 집에서, 나는 손님들 앞에서 태연히 바지를 갈아 입던 그와 그의 손자들을 만났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인사말을 건네던 아저씨에 애써 웃음으로 답했지만, 눈을 마주치지 못했던 것은 역시 내가 이방인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드카(‘’), 텡게르(‘하늘’) 라는 우리의 이름이 마음에 드셨던지 우리의 이름을 장난스레 연달아 부르던 담딘 후 아저씨와, 오전에 즐겼던 카드 게임을 무작정 시작하고선 나의 카드와 자신들의 카드를 넘나들며 게임을 진행하는 자르간 바이르와 우군 바이르, 사탕과 바텡(소고기 죽과 유사한 몽골 음식)을 건네는 에흐 아주머니와 환한 미소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건네는 보인나 언니와 그의 아들 엠츠카 덕분에 아주 정신이 없어진 나는 짧은 몽골어로 어떻게든 대화를 잇고자 진땀을 뺐다. 낯선 이에게 이렇게나 본인들의 공간을 공유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 시끌벅적하고 화기애애한 명절과도 같은 분위기에 잠시 이 곳이 한국인지 몽골인지 모호하게 느껴졌다. 몽골은 정말 별천지다.

 

 

나에게 privacy라는 단어가 불가침의 권리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이 질문에 가장 직관적이고도 즉흥적인 대답은 아마도 서양 문화의 영향쯤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러한 개인주의에 대한 숭배는 지극히 현대적인 것이라는 생각으로 자연스레 또 하나의 생각 고리가 연결되었다. 하지만 4 1실의 기숙사에 살던 나에게 나만의 공간이 절실했던 이유가 과연 그러한 서양적 관점에 치우친 교육, 혹은 개인주의에 가치를 두는 현대라는 배경의 영향에 의한 것인 지에는 반대편의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몽골 사람들에게 개인의 공간이 부재한 것은 기본적으로 유목이라는 그들 고유의 생활 방식에 있을 것이라는 데에 큰 이견은 없다. 하지만 남녀가 사랑을 나눌 공간조차도 개방적인 이 게르라는 공간을 사는 몽골인들에게 개인 공간에 대한 한 톨의 열망조차 없는 것일는지는 (나의 짧은 경험에 비추었을 때에는) 불확실하다.

 

모더니즘의 선두에 섰던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함을 설파했다. 그녀에게 물리적인 사적 공간의 부재는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독립성의 결핍과 직결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 남편과 아이들로부터 개인 공간을 침입 당하는 여성들은 자연스럽게 (특정 시각에서는 일반적으로 사회의 기득권 세력에 의해 규정되는) 관습, 혹은 전통적 사고 체계 속에 갇힌 채, 스스로 그것에 반하는 생각을 할 자유를 박탈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떠돌아 다니는 것으로 생존을 도모한 몽골 유목민들에게 그러한 독립성은 사치였던 것일까. 그리고 몽골 유목 사회에서 개인의 창의력 또는 사고의 독창성은 불가능한 것일까.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몽골의 위대하고 강력한 다르가(대장)인 칭기스칸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가능성에 발상의 전환이 배제될 수는 없지 않았을까. 몽골 사람들은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자신만의 방 (그것이 물리적인 것이건 정신적이건)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일까.

 

몽골에 온 지 15, 이 곳 하늘에 떠있는 별만큼이나 많은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하나 둘 의식의 창에 떠올랐다. 하지만 이 모든 물음에 답을 하기에 나는 아직 너무나 이방인이고, 이곳에서 살아갈 날들이 아직은 많이 남아 있다.